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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May 16. 2023

VIP

보통 가이드들은 단체 관광객들이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명단을 입수해서 최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때로는 한국의 모객 본사에서 VIP를 찍어주면서 실수 없이 잘 모시라는 귀띔을 해주기도 한다.

내가 왜 그러냐고 고참 가이드에게 물어봤더니 그래야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고 팁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전에 내가 H그룹 회장님을 한번 모셨는데 사흘 후에 팁만으로도 백만 원을 더 받았어.”라며 무용담을 자랑한다.

하지만 나는 내 특유의 똥고집 정신이 발동해서 절대 뒷조사도 하지 않고 본사의 VIP 특별 대접이라는 은근한 압력도 모른 척 무시한다.

내게 손님은 모두 똑같은 손님이다.

’VIP라고 해서 요금을 더 낸 것도 아니고 어떤 손님이든 벼르다가 큰 마음먹고 해외여행을 오셨으니 누구나 즐겁게 지내다가 가실 권리가 있고 또 공평하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직무다. 가난한 손님일수록 이 일생일대의 여행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 잘났든 못났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이나 학생을 편애하면 안 되듯이 손님도 절대 차별하면 안 된다.’ 는 게 가이드를 시작할 때 세운 내 똥고집 개똥철학이다.

다만 처음 버스에 오르고 여행을 시작할 때 서로 어색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각자 자기를 소개할 시간은 준다. 그러면 교양 있고 수준 높은 대부분 나의 손님들은 내 뜻을 십분 이해하여 자신의 지위나 재력을 과시하지 않고 겸손하게 이름과 직업 그리고 여행동기 정도만 간단히 말한다.

 아니면 한국인 특유의 발표 울렁증 때문이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장년의 남자 손님 한 분이

“저는 IT 업계에서 종사하다가 창업을 한 후 제 업체경영을 사모펀드에 넘기고 15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사람들은 감동을 하고 나는

“제가 원래 손님 차별을 안 하는데 이 분만은 더욱 특별히 모시려고 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손님들이 모두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이 분은 그 몸에 밴 성실함으로 내가 특별 서비스를 제공할 기회를 원천봉쇄해 버렸다.

첫날부터 교실의 모범생처럼 내 바로 앞자리에 고정석을 잡더니 내가 손님들에게 도시락이나 물 분배 등 무슨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면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내 조수를 자처했다. 사실 특별 서비스라고 했지만 딱히 해드릴 것도 없고 반 농담 그저 웃자고 한 말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분의 성실함을 내가 이용한 꼴이 되어버렸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죄를 드린다.)

바로 이 분, 오른쪽 끝 분이 내가 자체 선정한 ’진정한 VIP‘이시다. 외모부터 성실함이 배어있다. (좋은 이야기 칭찬이니까 초상권 좀 도용해도 되겠지요?)

그리고 그분의 봉사 정신 때문에 그 팀의 분위기는 참 묘하게 (나로서는 기쁘지만 난감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좋은 일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 옛말이 맞는지 무지불식 간에 서로서로 돕겠다는 풍조가 바이러스처럼 점점 버스 전체로 퍼져나가서 마지막 날에는 누가 손님이고 누가 가이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모두가 내 똘만이(?)들이 되어있었다.

요렇게

왼쪽은 엄청 큰 공기업의  이사님이시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남의 커피 심부름 봉사를 다 해보겠는가? 흐흐!

덕분에 그 팀은 일정이 끝날 때까지 모두 가족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여행을 했다.

감사해요 나의 VIP님!


그다음 VIP는 정말 어마무시한 분이었다. 물론 나는 처음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 앞에서 찢고 까불었지만…

그분은 사실 그 유명한 통진당 해산 판결을 포함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처리하신 대법관 출신이신데 내가 마지막 날까지도 그걸 모르고

‘캐나다에는 상속세가 없는데 그건 소득세와의 이중과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여기 사람들의 준법정신의 기원은 어쩌고저쩌고…‘ 하며 떠들었으니 이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기도 아니고 휴- 지금도 생각하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그분은 내색을 안 했지만) 내가 눈치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분의 정체를 대략은 알아챌 수도 있었다.

나는 가이드를 할 때 의도적으로 뻥을 치지는 않는다. 어떤 가이드들은 재미있게 한답시고 이야기를 부풀리고 만들어내기를 서슴지 않지만 소심하기 그지없는 나는 혹시라도 손님이 잘못된 정보에 속아서 나처럼 일생일대의 후회될 결정을 할까 두려워서 가능한 한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손님들도 나름 흥미롭게 들어주신다.

사실 예전에 인터넷이 없을 때는 그런 뻥이 통했다. 하지만 요즘엔 가이드가 조금만 미심쩍은 소리를 하면 로밍으로 무장한 손님들이 바로 검색 확인 사살에 들어가기 때문에 가이드하기도 훨씬 힘들어졌다고 선임 가이드들은 푸념을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캐나다 로키 산맥 깊은 산 속이나 평원에는 아직도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도 안 터지고 심지어 라디오 전파도 안 잡히는 오지 원시시대를 살아가는 곳도 있기 때문에 그런 곳에 가면 자신들의 말이 곧 길이요 진리요 법이 되는 가이드들은 아주 신이 난다.

아무튼 그날도 나는 루이스 호수를 지나가면서

“루이스 호수의 이름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공주의 이름을 딴 것으로 남편은 앨버타 공으로 지금 앨버타 주가 그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 캐나다에는 이처럼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 종교도 성공회가 많은데 그것은 16세기 영국의 헨리 7세가 자신의 이혼을 위해서 창립한 것으로  …“라면서 잘난 체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혼잣말처럼

“헨리 8세인데..”라고 중얼거릴 때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아봤어야 했다.

그 후에 우리가 밴프의 호텔에서 묵을 때 또 한 번 기회가 있었다. 마침 날이 더워서 에어컨을 틀려고 했더니 보이지가 않아서 안내에 문의를 했는데, 이런! 하루에 80만 원이나 받는 호텔에서 에어컨이 없다며 선풍기를 내놓으면서 하는 설명이 “밴프는 여름에도 시원해서 에어컨이 필요가 없고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손님들은 화가 났고 나는 죄 없는 죄인이 되어 사죄를 하는데 이 분이 나서서

“그럴 수도 있다. 오늘이 유례가 없는 더위다. 지금 우리가 화를 내도 달라질게 없다. 차라리 즐겁게 여행을 하는게 현명하다. 베란다 문 열고 선풍기 틀어놓으니 옛 시절 생각도 나고 좋더라.” 라며 무마를 할 때 내가 또 알아봤어야 했다.

그리고 그분에게 극진했던 좀 나이 차이가 나던 일행친구는 사실은 그분의 수행원이었는데 눈치가 메주인 나는 그걸 모르고 저 젊은 친구는 여행 벗을 잘못 골랐네라고 동정을 했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그분이 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셨다. 물론 나는 놓쳤지만…

그날은 모레인 호수를 끼고돌아 랏찌 밸리를 타고 윌콕스 패스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내내 소나무 숲 사이로 에메랄드 빛 호숫물에 비친 열 봉우리를 바라보는 경치가 끝내주는 최고의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정상에 올라 쉬면서

“우리 이선생, 가이드가 마음에 들어서 선물 하나 드리리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즉석 한시를 지어주시어서 칠일 간의 우리의 여정을 멋지게 마무리해 주셨다.


七日靑天頭上帽

十峯屏湖掌中杯

(칠일 간의 푸른 하늘은 머리 위의 모자요

열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친 호수는 손바닥 안의 술잔이로다)


감사해요 멋진 선물

죄송해요 VIP 몰라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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