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도 가짜가 있다.
수국이나 포인세티아의 크고 화려하게 핀 꽃은 사실은 가짜 꽃이다.
이 꽃은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기 위한 속임수이고 정작 암술과 수술을 가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진짜 꽃은 가운데에 있는 작고 초라한 꽃이다. 가면, 가발, 가식 등 모든 가짜가 그러하듯이 꽃도 가짜가 진짜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다채롭고 위엄이 있다. 그래서 속기 쉽고 그래야 속는다.
또한 서호주에 있는 망치 난초 꽃 주변에는 암 말벌 모양을 한 가짜 꽃이 있는데 이는 수분을 매개하는 수 말벌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며 중남미의 바구니난초는 페로몬을 만들어서 난초벌에게 공급하고 수벌은 이것으로 암컷을 유혹한다. [리처드 도킨스, 마법의 비행] 어떤 새들은 포식자로부터 둥지 속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날지 못하는 척하기도 하고 어치와 다람쥐나 일부 영장류는 먹이를 차지하거나 숨기기 위해 도둑을 속이는 거짓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짜를 만들고 속임수를 쓰는 대가 중의 최고는 바로 인간이다. 고도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쩌면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 두뇌가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서로 속임수를 쓰고 속임수를 탐지하여 역공하는 능력은 육체적, 지적 능력과 더불어 권력 쟁취와 이성 유혹에 필수적인 능력으로서 이에 능숙한 자와 집단은 생존과 번식과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속임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탐지가 어렵고 그만큼 그 속임수에 당했을 때의 물리적 피해와 심리적 충격이 매우 크다는 점은 유명한 '트로이 목마'의 역사적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난, 과로, 폭력, 전쟁, 죽음 이런 것들처럼 원래부터 아프고 괴로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들보다 더 우리를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속임수인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과 풍요로운 안정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배신이나 재난, 사기라는 준비되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와 뇌리 속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아 삶의 의욕과 희망마저도 야금야금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저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집 앞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서쪽 산 등성이 너머로 구름과 햇살이 어우러지며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해가는 장엄한 붉은빛의 향연을 바라보는 그 평안하고 행복한 순간에도 '과연 이 편안함이 지속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믿을 수 있을까? 이 행복은 진짜일까?'라는 쓰잘대기 없는 걱정과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반대급부로 우리 집 강아지의 꼬리를 보면서 한 없는 신뢰와 안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개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고 특히 그 꼬리는 속임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좋으면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고 무서우면 꼬리를 감추고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치켜든다. 강아지 꼬리는 좋으면서도 싫은 척, 싫으면서도 좋은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줄을 모른다. 강아지 꼬리는 정직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충실하게 따르는 내 개 덕분에 행복하고 그 정직한 눈과 꼬리가 좋다.
하지만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이 가짜와 진짜, 정직과 거짓말은 어쩌면 인간이 만든 개념과 관점일 뿐 사실은 모든 것이 진짜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 '가짜' 꽃도 그 식물의 일부분으로서 벌이나 다른 수분의 매개자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점에서 '진짜' 꽃 '만큼' 진실하다. 동물의 '거짓' 행동도 생존과 번식의 한 수단일 뿐이므로 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한다면 먹고 마시고 싸고 짝짓는 것도 '나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발과 화장과 성형을 가짜라고 한다면 옷이나 온갖 장신구도 모두 속임수이며 평판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정직한 노력과 선행도 위선과 구분이 모호해진다. 더욱이 배구나 축구, 권투 같은 스포츠에서 상대방을 속이는 feint motion은 속임수가 아니라 찬사를 받는 기술의 일종이다. 전투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동등한 조건에서 싸운다는 기사도는 이제 사라지고 위장하고 속이는 것이 당연한 전술과 지략이 되었다.
약간 논리적 비약 같지만 결국 모든 존재는 진실이며 진짜다. 꿈과 상상과 말과 속임수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진짜'도 일시적이어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이 말은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이나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에 집착하지 말고 '가짜'나 '속임수'에 불안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 AI를 악용한 딥페이크와 가짜 뉴스가 넘쳐나고 보이스 피싱 등 온갖 사기꾼이 득시글 득시글 하지만 속임수에 속는 것보다 더 큰 피해는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기회손실의 비용이 더 크다. 배신당할 것이 두려워 우정과 사랑과 인류애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속고 좀 더 아프자. 또한 다행히도 우리가 북한 하마스 같은 비이성적 체제하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크게는 인류가 이룩한 현 문명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의 생존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작게는 속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좀 위안이 될까?
그러니 속을까 봐 너무 의심하고 불안해하지 말고 다만 편견과 욕심을 버리자. 세상에 참과 거짓의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믿는 것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자녀들에게 남을 믿지 말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 이웃을 믿으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에게 정직하면 그만큼 속을 일도 적어진다.
믿자!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