得道 行道 道通
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이다.
'朝聞道夕死可矣‘는 里仁篇에 있는 공자의 유명한 말로.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다.
나는 그동안 참 여러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았다. 막노동 육체노동 반복작업 정신노동 서비스업 전문직 교직 투자 외환 금융 건설 여행 운수 군사 더러운 일 힘든 일 지루한 일 스트레스받는 일 참는 일 비위 맞추는 일 조마조마한 일 권위 있는 일 부리는 일 복종하는 일 싸우는 일 위험한 일 은밀하게 하는 일 슬그머니 속이는 일 거짓 웃음을 파는 일 무서운 일 신나는 일 뿌듯한 일 자랑스러운 일 억울한 일 부끄러운 일 치사한 일 후회스러운 일 보람이 있는 일 설득하는 일 계산하는 일 만들어 내는 일 고안해 내는 일… 등등… 그런데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쉬운 일은 없었다. 겉으로는 좋고 편안해 보이는 일도 나름의 고충은 다 있었다. 천하에 만고 땡이라는 은행도 실적을 내야 하는 부담이 있고 큰 소리 빵빵 치는 대기업에도 접대부담이 있으며 하다못해 철밥통 교사도 반항학생 학부모 교장 교육청 갑질과 승진알력이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외국 여행업도 남들이 물으면 ‘그럼요. 좋은 곳에 놀러 다니며 돈도 버니 참 재미있어요 ‘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어서 즐겁게 해 주기가 어디 쉽겠는가? 같은 곳을 들러도 어떤 사람은 아쉽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하고 다른 분은 빨리 호텔로 가서 쉬고 싶다고 한다. 이러니 손님을 웃게 하려면 그만큼 가이드 속은 문들어져야 한다. 그런 신경을 안 쓰려면 사무실에서 복잡한 일정계획을 짜거나 나와서 운전을 해야 하는데 매일 10시간 정도 운전대에 앉아 있으면 지루하고 졸리고 결리고 좀이 쑤시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더욱이 능력이 없으니 성실 하나로 버티면서 깐에는 잘해보겠다고 평생 지각 조퇴 결근을 한 번도 안 할 정도로 결벽성 완벽주의 ’ 더러운’ 성격을 가진 탓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볶아대니 어디 아무리 건강체질이라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래도 버텨내기 위해서 나는 그 비결로 힘든 일과에서도 좋은 면 하나를 찾아내서 그걸 버팀목으로 삼는다. 찾아보면 어디에서나 좋은 점은 반드시 있었다. 심지어 50톤 트럭에서 오물을 치울 때에도 운수사업과 캐나다 정착의 성공을 바라며 버텼고 더운 날 천리행군을 할 때도 휴가 나가서 애인을 만나 수박 팥빙수를 먹을 상상이 힘이 되었다.
지금도 새벽 5시에 일어나 8시간째 운전을 하고 있으니 너무 힘들다. 바쁜 여름이라 쉬는 날도 없어서 피로가 누적되어 돈이고 보람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우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그래서 이어폰을 꺼내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한 잔 사서 마신다.
갑자기 경치 좋은 창 넓은 카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짧게나마 든다. 어디 카페가 별 건가? 앉아서 음악 듣고 차 마시며 풍경 바라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정말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인가?
나는 어릴 때부터 의문이었던 숙제가 하나 있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 길에 나섰다가 밤에 동굴에서 바가지에 있는 시원한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그 바가지가 해골이었다는 것을 알고 구역질을 한 후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사를 읽고 나도 나름 감동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에도 曉자를 넣었고 마음으로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탐구하고 갈구했다.
어린놈이 무슨 청승이냐고 하겠지만 나 나름으로는 꽤 진지했다. 어쩌면 그 말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에 심취한 나의 아버지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의 원망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무기력했던 나는 그 암울함을 벗어날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정신승리라도 필요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는 것 만으로 실제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 때는 정반대로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빠져버렸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순탄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물적 토대와 모순이 오히려 제도와 마음을 움직여온 역사라는 이론이 훨씬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좀 더 세상을 경험하다가 보니 물질적 기반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평화와 풍요와 행복이 보장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질적 조건과 인간의 대응을 나타내는 ‘쌀독에서 인심 난다’(유물론)와 ’ 99 섬지기가 1 섬지기 것을 빼앗아 100 섬을 채우려 한다‘(유심론)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만 현실에서는 둘 다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원효 할아버지가 와도 마음만으로는 어떤 물도 만들어 낼 수 없다. 마음만으로는 해골 물이든 샘물이든 물 자체를 저절로 만들어 낼 순 없다. 그러니 일단 먼저 물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물의 필요와 조건이 모두의 마음을 천편일률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물의 존재 여부와 상태가 물을 구하는 마음을 움직이고 그다음에 자유의지를 가진 각 개인의 마음이 하는 일은 물을 뜨러 갈 결심을 하고 적당한 물통을 골라 최적의 경로로 물을 떠 오고 도중의 난관을 견디며 해결하고 그 물의 최적 가치를 해석하여 분배 활용하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분쟁을 조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인데 그 대응은 사람마다 제도마다 다르다. 결국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정신과 물질은 어느 한쪽이 상대를 일방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므로 그 기전을 밝혀 물질과 마음이 조화롭게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一切唯心造가 아니라 一部唯心造가 정답이다. 그래서 주희도 中庸을 최고의 道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좀 지루하겠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공자가 진리를 갈구한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빠뜨렸다. 즉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이며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실천이 불가능한 진리는 가설에 불과하므로 앎과 실천을 동시에 고려했어야 한다. 아침에 도를 깨달았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그 도에 따라 잘 살아야 그 도가 참임을 입증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하자면 또 길어진다. 원효가 속세로 돌아와서 요석공주랑 사랑을 하고 설총을 낳고 포교하며 산 의미도 알아야 하고 득도에 이어지는 頓悟頓修 頓悟漸修 논쟁 그리고 성리학의 理氣 논쟁, 서양철학의 이데아 형이상학 논쟁, 공리주의 실용주의를 소환하고 주기도문의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뜻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愚公移山’이나 ‘성자가 된 청소부’류의 지극한 정성의 실천은 이론과 깨달음이 없이도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류의 직관적인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에 부닥치면 그저 소원성취를 비는 돌탑 쌓기처럼 어리석은 헛수고나 비숙련 노동자가 하는 수없이 많은 하찮은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 비록 너희들이 받는 대우는 시원찮지만 모두 인류와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라는 식의 노동착취의 정당화나 하층계급의 불만을 달래는 속임수로 악용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실천을 언급할 때는 또 한 번의 깨달음과 결단이 필요하다. 즉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옳은 것을 알고 바르게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힘겨울 때는 (가야 할 길이라면 도피를 하지 않고) 일상에서 음악과 차 한 잔의 작은 여유를 즐기기도 하면서 고행을 하는 자세로 내적 성숙을 추구하고 기뻐한다.
삶의 행로에는 좁은 길에서만 얻는 것이 있고 시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지 못하면 시련은 그저 고통이고 좁은 길은 단지 불편한 난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