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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홀로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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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Aug 23. 2023

온정의 나라 스페인

   스페인 단체 관광객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일정표를 받아 드니 시작을 하기도 전에 바짝 긴장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는 변수의 조합이다.

  우선 내 경험상 서양사람들이 겉으로는 밝고 친절해도 세부적으로는 은근히 까다로운 면이 있다. 규정에 따라 합리적으로 일이 처리되기만 하면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이 화기애애하게 잘 지나가는데 세상 일이 어디 순리대로만 이루어지겠는가? 때로는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이 사람들에게는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거나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상냥하게 웃던 사람들이 갑자기 헐크로 변신해서 막 잡아먹을 듯이 지적하고 항의하고 시정과 배상을 요구한다. 아! 그래서 이 사람들이 트랜스포머나 스파이더맨 어벤저스를 좋아하나 보다. 평소엔 평범하고 양순한 시민이다가도 불의를 보면 괴력을 가진 슈퍼맨이 되는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더욱이 이번 팀은 단체 교사 팀이다. 단체가 어려운 이유는 한 사람의 불만이 쉽게 전체의 불만으로 번지고 증폭되기 때문에 그 요구가 오해이거나 불합리하더라도 그냥 무시하거나 각개격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평의 조짐이 있으면 미리 파악해서 선제적으로 대처하거나 여론 리더와 최대한 빨리 레포를 형성해서 의사소통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들은 의사 변호사들과 더불어 원리원칙에 익숙하고 융통성이 없는 편이기 때문에 일정에 충실하고 언행을 좀 더 공손하게 하되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스러운 느낌을 티내지 않으면서 느낄 수 있도록 짜연스럽지만 과하지 않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을의 비굴함을 드러내서 혹시라도 갑질을 한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지않게 하면서도 교양인답게 고급스러운 유머로 흥겨운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핵핵…(노골적으로 특별대우와 아부를 요구하는 나랏돈 여행객보다 더 어렵다.)

  다음은 16일간의 긴 일정이기 때문에 내가 가 보지 못한 구석진 곳까지 방문하기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그 한 번의 실수가 일정이 끝날 때까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휴 세상 일에 쉬운 게 없다. 여기 까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프다. 아무튼 미리 방문지 자료와 정보를 찾고 ‘Buenos días’ 등등 팔자에 없던 간단한 스페인어 인사도 외우고 첫날 아침 일찍 일을 나섰는데 아뿔싸! 시작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한다.

  회사에 도착하여 버스 문을 열려고 하니 주머니에 열쇠가 없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보니 식탁 위에서 차 열쇠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나의 경박함을 비웃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평소처럼 주머니에 두지 않고 잘 챙긴답시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눈에 잘 뜨이는 곳에 꺼내 놓은 것이 오히려 사달이 난 것이다. 집에 다시 갔다가 오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져서 버스를 끌고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성실히 정성껏 과도하게 친절을 베풀어서 겨우 손님들의 미소를 이끌어내며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식당에 내려가 보니 또 분위기가 좋지 않다. 상황 파악을 해보니 호텔 부설 식당의 종업원이 융통성이 없어서 단체 손님들 하나하나에게 계란의 완숙 정도와 셀러드 소스까지 세부적으로 주문을 받아서 요리를 하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에서 동행한 가이드는 영어도 딸리고 빠릿빠릿하지가 않아서 문제해결을 못하고 우두커니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랴부랴 내가 나서서 한국식으로 메뉴를 한 두 가지로 대충 통일해서 주문을 주방에 밀어 넣고 사태수습을 했다. 덕분에 조금은 점수를 만회하고 일정을 마쳤는데

  다음 날 아침 식당에 내려가 보니 또 한 사람이 종업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가족을 이끌고 온 은퇴한 교사인데 나이도 지긋하고 경력과 카리스마가 있어서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문제는 다른 단체 팀이 같은 호텔에 묵었는데 예약한 메뉴가 서로 엉켜버린 것이었다. 가이드는 아직 내려오지도 않아서 또 내가 교통정리를 했다. 사실 나는 모른 척 운전만 해도 되는데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 걸 보면 내 일중독은 고질병인가 보다. 그래도 덕분에 이 분의 가족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통성명을 하고 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1 일 1 사건인지 다음 날엔 일행 중의 한 명이 산에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일정이 예정보다 3시간이나 지연되었고 그러다 보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심야공사로 도로가 통제되어 호텔로 가는 길이 막히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가이드는 또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고 산 속이라 우회로도 없으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임시변통으로 버스를 돌려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갔더니 휴가철이라 방 하나에 하룻밤에 80만 원이고 그나마 단체가 투숙하기에는 방도 부족했다. 버스에 올라가서 뒤쪽을 바라보니 이제는 가이드뿐만 아니라 모든 일행이 자리에 빼곡히 앉아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내 처분만을 바란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예전에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때와 소대장 시절에 소대원을 인솔할 때의 그 막중한 책임감이 되살아났다. 하는 수 없이 규정에는 어긋나지만 버스 안에서 비박을 하기로 했다. 여자는 호텔 로비에 각개 침투해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남자는 드넓은 캐나다 자연 화장실을 쓰는 걸로 작전을 짜고 일정 간격으로 버스 히터를 틀어서 난방을 하고 각자 의자에 기대거나 엎드려서 길이 뚫릴 때까지 자기로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위법이고 계약위반이니까 (다음날 안전운전을 위해 운행이 끝나면 기사는 버스를 벗어나 적절한 숙소에서 8시간 이상 자야 하고 이 때 손님을 차 안에 남겨놓으면 안된다.) 모두 비밀을 지키기로 서약했다. (이런, 내가 지금 배신을 하고 있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정도면 왠만한 손님이면 가이드와 여행사에 항의하고 환불 소동이 나고도 남을 일인데 이 사람들은 그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불편을 참으면서 누가 잠꼬대를 하거나 방귀를 뀌면 키득키득 소리죽여 웃기도 하고 오히려 재미있는 추억으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온정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이 사람들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다음 날 새벽에 마침내 길이 열려서 버스가 호텔로 들어갈 때에는 모두 나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나는 일약 30명의 스페인 팬을 가진 영웅이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나와 일행은 낯선 타국의 기사와 손님이 아닌 오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 발짓 표정으로 서로 챙겨주고 서툰 영어로 농담하고 장난도 치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집으로 기약없는 초청까지 하게 되었고 마침내 마지막 날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아쉬움에 나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열정적인 축구와 투우와 플라멩코의 나라 스페인 사람들이 마음속에는 한국의 동네 아저씨 아줌마 같은 푸근한 정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또 사람의 진심과 정성은 (때로는 이용만 당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나이와 국경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느꼈고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도 미소가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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