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보다 견고한 취향

짐웨어도 패션이야

by quietrebel

꾸미면 꾸밀수록 남루해지는 외모를 가졌을지라도, ‘패션’을 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옷을 잘 입게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 결핍 섞인 위악이 어릴 적부터 나를 남들보다 지독하게 ‘외피’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30대의 어느 날, 인생 최저 몸무게를 경신하며 찾아온 소위 ‘외모 정병’은 나의 이 끔찍한 집착을 비로소 완성시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컨셉의 OOTD. 거울 앞에 서서 완벽하게 세팅된 내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제서야 세상과 마주할 자격을 얻은 기분이 들었고 만족감이 밀려왔다.


그런 내가 운동을 하러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장'에 가게 된 것이다. 어딘가 거치된 ‘회원복’ 한 벌로 30년 인생의 밑바탕을 갈아엎을 수는 없었다. 사방이 거울로 도배된 그곳에서, 나의 결벽에 가까운 집착은 자연스럽게 ‘짐웨어’라는 새로운 아카이브를 형성했다. 닥치는 대로 운동복을 사들이면서, 그 어떤 패션인도, 헬스인도 공감하지 못할 나만의 지독한 짐웨어 연대기가 시작된 것이다.




Chapter 01. 철칙들


Rule 01. 브랜드 순혈주의

짐웨어에 있어 ‘믹스 앤 매치’는 고도의 패션 전략이 아니라, 그저 슬픈 광경일 뿐이다. 이를테면 내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은 아디다스 신발에 나이키 양말을 매치한 누군가의 발목을 내려다보는 것. 나이키 탑을 입었다면 양말의 스우시까지 그 궤를 같이해야만 한다. 서로 다른 로고가 충돌하는 순간, 그 브랜드의 유구한 헤리티지가 한데 뒤엉키다 결국 붕괴되고 만다. 과연 누가 신경이나 쓰냐고? 바로 내가. 단 하나의 불순 로고도 허용하지 않는 단일 브랜드 풀착장. 이것이 '스포쓰 브랜드'에 대한 나만의 예의이다.


Rule 02. 미학적 검열

티셔츠 한복판에 시대착오적인 비장함으로 박힌 이름 모를 한자들, 정체 모를 긍정 에너지와 거창한 철학적 명사들이 도배된 옷들. 그 단어들이 상징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대체 나는 알 길 없다.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옷인가? 요즘은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해 오픈런과 품절 사태가 매번 이어진다고 한다. 헬스인으로서 나도 한 벌 쯤은 소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유행이어도, ‘헬짱’ 필수 짐웨어 브랜드라고 해도, 옷은 옷이다. 내 눈에 아름답지 않다면 구매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아니, 내 몸에 걸칠 수 없다. ‘운동복’이기 이전에 ‘예쁘지 않은 무언가’ 일뿐이다.


Rule 03. 오답의 배제

룰.루.레.몬. 소설〈롤리타〉의 도입부처럼, 입술 끝에서 시작해 입천장을 훑고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마치는 그 리듬감 넘치는 이름. 그 이름만큼이나 매끄럽고 아름다운 이 브랜드는 내게 ‘오답’에 가깝다.

헬스장에는 항상 그런 ‘사슴’들이 존재한다. 큰 키와 하얀 피부, 얇상한 팔다리와 빚어놓은 듯 완벽한 두상. 내가 갖지 못한 미학적 요소를 천부적으로 타고난 그녀들이 룰루레몬 및 비슷한 여성 에슬레저 브랜드를 휘감고 요정처럼 나타날 때, 나의 지독한 ‘패션’에 대한 믿음은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 완벽한 조화 앞에서 나는 그냥 ‘거적때기’를 입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운동복에도 조차 취향의 날이 서기 시작하자, 그와 같은 브랜드에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선사하는 어여쁜 실루엣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답에 가까웠다. 1+1, 3+1은 세트들은 이제 그만 방황하던 초보 시절의 유산으로, 사슴 같은 그녀들의 전유물로 남겨 두자.



Chapter 02. 브랜드 아카이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입문 | 젝시믹스 & 안다르 - 헬스장에 첫발을 내딛던 시절의 전투복. 바람막이로 꽁꽁 가렸지만 브라탑, 레깅스, 티셔츠, 니삭스까지 세트로 맞춰 입으면 왠지 어 저 사람... 스타일에 신경 썼는데? 말랐는데도 관리하네. 저러니까 말랐지 ㅠ ㅠ. 그래도 운동 좀 할 것 같은데? 나를 내가 나 혼자 의식하며 운동하는 척하던 흑역사의 시작이었다. 세트 구매 시 '가성비' 최고.


셀프 엠베서더 | HDEX & 본투윈 - 번개 같은 속도로 트렌드를 반영해 매 시즌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브랜드. 가성비를 압도하는 묵직한 질감도 한 몫한다. 트렌디함 + 은은하게 운동한 티 + 예쁨 다 챙기고 싶으면 이들 브랜드를 택하라. 부츠컷 레깅스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트릭과 텐션은 내 운동 의지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지지대다. 하도 많이 사서 셀프 엠베서더에 발탁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마치... 스우시 | 나이키 -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키로 도배하고 싶은 날. 인간 스우시가 되고 싶은 날. 그런 날이면 나는 몸에 달라붙는 짧은 칠 니트를 입고, 우븐 소재의 바지와 세트인 겉옷을 걸쳐. 푹신한 쿠션 양말을 신고, 모자를 눈바로 위까지 아주 깊게 눌러써. 마지막으로 줌보메로나 V2K 런을 가방에 챙기면 끝. (아, 오션프롬블루의 'Swoosh'를 듣는 걷도 잊지 마)


위시리스트 | 다시 고정 수입이 생기면... 무조건 짐웨어부터 구입할 것이다. 언더아머 세트로 강화+1, 알로의 감각적인 탱크톱으로 패션+1 스탯을 찍고... 기회가 된다면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HDEX 스웻 후드, 팬츠 세트, 본투윈의 컴프레션 집업, 그리고... 나이키 스킴스, 짐샤크, 영엘에이, GASP.... 세상엔 아직 내가 입어보지 못한 옷들이 너무나 많고, 나는 이제 운동만큼이나 짐웨어를 구경하는 일에 진심이 되어버렸다.





짐웨어 역시 이 지독한 탐미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엄연한 ‘패션’이다. 고작 2kg의 핑크 덤벨이나 드는 주제에 유난스럽다고 비웃을지라도, 나의 ‘태’만큼은 3대 500의 기세를 뿜어내는 언더아머급이어야 한다. OOTD를 선보일 유일한 런웨이가 헬스장뿐이라는 사실이 때로 서글플지라도, 나는 꿋꿋이 내일의 ‘전투복’을 고르며 잠을 청한다. 옷장에 차곡차곡 쌓인 짐웨어의 부피만큼 나의 자아는 견고해졌고, 남루했던 자신감은 선명한 근육처럼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기세는 곧 ‘외피’에서 나오기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패션이 아닌, 오직 나라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우아한 사치, 그것이 내가 짐웨어를 대하는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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