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Britney, bitch

캐럴 대신 운동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고독한 크리스마스

by quietrebel


2025년 12월 24일. 이 밤, 저는 홀로 어떤 외로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네, 제 생애 가장 슬프고 가난한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입니다.


사실 오늘은 근육통이 심해 발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네요. 운동은커녕 머릿속에 영감도, 글감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창의력과 생산성? 그런 건 이미 산타의 썰매에 실려 멀리 떠난 것 같고, 남은 건 '휴재 공지를 올릴까' 하는 비겁한 고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죠! 저는 비록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 있지만, 여러분이라도 제 몫까지 열심히 득근하시라고, 힘들때 마다 저를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비기’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아낌없이 공유합니다.


제 영혼의 일부를 드릴 테니, 여러분은 부디 저 대신 덤벨을 들어주세요!


PART 1. 현관문 돌파용: "2000년대 배디들의 가스라이팅"


때로는 필요악이 필요합니다. 비록 스피커로 다 같이 듣기에는 다소 창피 할 수 있더라도. 남 몰래 숨어 듣는 나만의 금세기 최고의 명곡들...세기말과 밀레니얼 초창기를 지배한 바로 그 언니들이 내 귓가에 "너는 최고야"라고 속삭여줘야 겨우 현관문을 나설 수 있거든요.


* Britney Spears - Gimme More: "It's Britney, bitch." 이 한 마디면... 돼. 수면 바지 차림의 내가 갑자기 배디(Baddie)가 돼.

* Ashanti - Only U: 아산티의 끈적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가 들리면, 에너지가 차오르곤 한다. 헬스 클럽이 홍대 클럽이 되어도 난 몰라.

* Janet Jackson - All For You: 자넷 언니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어질어질 했던 어제의 폭식을 잊어본다. 그루브와 비트는 헬스장까지 가는 길을 순식간에 하이웨이로 바꿔 놓는다.

* Missy Elliott - 4 My People: 이 곡의 비트가 터지는 순간, 내 심장의 리듬도 터진다. 이미 마음은 헬스클럽 혹은 노스탤지어로 가득한 힙합 클럽 한복판. "Work It!"이 다음곡으로 나오기 전, 이 곡으로 예열은 충분하다.


PART 2. 중량: "웨스트사이드와 트랩의 폭격"

헬스장 문을 여는 순간, 세기말 배디의 자아는 잠시 접어둔다. 이제 필요한 건 거친 기세. 이곳은 인천 어느 헬스장이 아니라 LA의 어느 골목, 혹은 뜨거운 힙합 클럽의 한복판.

* 2 Pac - California Love & Hit 'Em Up: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 예열하고, 투팍의 독설이 쏟아지는 Hit 'Em Up이 나오면 핑크 덤벨은 어느새 내 목에 걸린 묵직한 쇠사슬처럼 느껴진다.

* Travis Scott - FE!N & MODERN JAM: 유튜브 Recap 피셜 트래비스 스캇 상위 리스너의 추천. 파괴적인 비트, 트렌디한 리듬은 중량 아래 깔려있는 나를 밀어 올리는 유일한 동력일 뿐.

* Kanye West - Fade: 이 음악의 뮤비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테아냐 테일러가 되는 듯한 착각 속에서 몸을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다. 묵직한 베이스 라인과 그의 음성이 깔리면 내 몸도 무언가에 홀린 듯, 테아냐 와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 Kendrick Lamar - m.A.A.d city: 켄드릭의 래핑이 들리면 벤치 프레스 한 세트가 아니라 인생 한 세트를 마치는 느낌이다.

* Future - Way 2 Sexy: "너무 섹시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뻔뻔한 마인드로 스쿼트 랙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면 야 나도 섹시할 수 있어!


PART 3. 추억 보정용: "내 안의 소년이 외치는 무한대(無限大)"

가끔은 분노나 턴업보다, 뜨거운 노스탤지어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덤벨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 세기말 일본의 질주감을 소환한다.

* Wada Kouji - Butterfly: "무한대한 꿈의 뒤편의..." 첫 소절이 들리는 순간, 나는 디지털 월드를 구하러 가는 선택받은 아이가 되곤 하지.

* L'Arc-en-Ciel - Driver's High: 뛰거나 걷거나 오르거나. 심장이라는 엔진을 달궈야 할 때 이보다 완벽한 곡은 없다. "Clash! Flash!"

* Ikimonogakari - Blue Bird: 창공을 가르는 푸른 새처럼, 유산소 머신 위에서 비상하고 싶은 욕구를 이 청량한 목소리와 가사로 대리만족시켜 준다.


PART 4. 유산소 무아지경: "여긴 베를린인가, 인천인가"

마지막 유산소 시간. 이때는 자아를 아예 로그아웃시켜야 한다. 내가 지금 달리는 곳은 러닝머신 위가 아니라, 200 몇 년, 새벽 4시의 어느 클럽. 혹은 새벽의 어느 트랙 위.

* Tiësto - Adagio For Strings / Lethal Industry: 무려 2004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연하신 분이야. 웅장한 사운드가 터지면 헬스장은 순식간에 페스티벌, 아니 올림픽 스타디움의 메인 스테이지.

* Motorcycle - As The Rush Comes: 몽환적인 보컬이 들리는 순간, 공간감은 철저히 왜곡된다. 여긴 베를린인가, 아니면 인천 어느 헬스장의 천국의 계단 위인가.

* Robert Miles - Children: 클래식 트랜스의 정수. 서정적인 선율과 뭔가 오래된 느낌의 규칙적인 비트에 발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무아지경(Trance)만 남는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문득 이런 걱정이 드네요.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헬스장에 나타나 묵직하게 쇳덩이를 드는 저 여자를 보고, 사람들이 "와, 저 사람 진짜 어지간히 약속이 없나 봐. 크리스마스에 헬스장... 실화?"라고 수군대면 어쩌죠?


그 (누구도 보내지 않을) 시선이 조금은 두려워서, 저는 내일 참아보려 합니다. (절대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자칫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까 봐, 저는 깔끔하게 하루 더 쉬고 26일에 가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이 플리와 함께 저보다 근육 빵빵한 이브 보내시길 바랍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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