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헬스장에 갈 수 없는 344943가지 이유

by quietrebel

문 밖을 나서다 다시 들어오거나, 신발을 신었다 다시 벗거나, 운동 가방을 챙기다 말고 조용히 내려놓거나, 옷을 입다 말고 벗는다. 사실, 애초에 이불속에 누워 머리로 모든 결정을 내렸다.


“오늘은 운동 '못' 가겠는데?”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내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이고 감정적인 데이터들이 아주 치열하게 부딪혔다.




업보의 가시화

이틀 전 먹은 피자와 과자들이 마침내 뱃살과 뾰루지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먹을 땐 그냥 입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우리 몸은 그것들을 정확히 이틀 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 붓기는 물론, 군살 정리조차 안 되어 브라탑 핏이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수준이다. 거울을 보자마자 "아... 오늘은 안 되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다.


미스터리한 통증

왼쪽 발등과 뼈 마디 사이사이 지속적인 통증이 점점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계속 아플 뿐이다. 근육통일까? 뼈를 다쳤나? 통풍인가? 죽을병인가? 모르겠다. 통증이고 뭐고 그냥 다 아프다는 핑계로 운동이고 뭐고 외면하고 싶다. '아프면 쉬어'라는 왼쪽 발등의 외침 말고는.


미세한 근육통

오늘 하려던 부위에 근육통이 아직 남아 있다. 대체 왜지...? 오늘쯤이면 분명 회복이 되어야 정상인데. 미세하게나마 근육통이 있다. 그렇다. 이건 몸이 보내는 신호다. '오늘은 좀 쉬어'라는. 혹은 괜히 가기 싫으니까 엄살을 부리라는 뇌 신호. 하지만 오버트레이닝은 부상을 부른다. 그러므로 쉬는 게 맞다.


브레인 포그 혹은 수면 부족

눈을 떠도 정신이 몽롱하다. 밤새 원인 모를 고민으로 뒤척이다 아침이 다 돼서야 야 잠든 탓이었다. 내 정신은 아직 어제 그 고민 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무기력과 우울감에 더해진 두통, 빠질듯한 안구. 이대로 운동을 하다가는 이마를 짚고 헬스장 한복판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톡스 시술 후 주의사항

이번에는 네 부위나 보톡스를 맞았다. 보톡스 시술 후에는 일주일간 음주, 흡연, 과도한 운동, 사우나/찜질방 이용을 피하고,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한다. 가슴운동 할 때 이상하게 턱 근육에 힘이 더 들어가서 충분히 자리 잡히면 복귀하는 게 좋을 것만 같다. 유산소를 하기에도 땀과 열기가 문제다. (늙어가는) 얼굴을 지키려면 운동은 잠시 멈춰!


에어팟 방전

헬스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 에너지를 끌어올리지 못한다. 오늘은 Kanye West -Fade 들으면서 출발하고 싶단 말이야. 내가 선곡한 플레이리스트가 없다면 퍼포먼스는 반토막 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절대 못 간다.


애플워치 사망

어디서 주워 들었는데 심박수 ‘존 2(Zone 2)’를 유지해야 체지방이 빠진다나... 워치가 잠들었으니 지금 지방이 타는지 수명이 타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캐시워크와 교보 라플 포인트도 못 쌓는다. 과학적·경제적 이유로 절대 못 간다.


레깅스 실종

이상하다. 어제 분명 빨았는데 브라탑과 세트인 레깅스가 보이지 않는다. 골라 놓은 착장이 모두 흩어졌다. 아 건조를 안 돌렸구나. 빨래통 안에 있는 축축한 걸 입을 수도 없고, 그냥 망했다. 다른 착장을 입고 가는 시뮬레이션? 거기까지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제모 유예

제모를 못했다. 제모가 되지 않은 내 다리, 아무도 안 보겠지만, 긴바지를 입으면, 레깅스를 입으면 그만이지만, 왠지 자신감이 하락할 것 같다. 자세가 흐트러질 것 같다. '나'는 안다.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수치심을.


공복 원칙 붕괴

눈뜨자마자 밥을 먹어버렸다. 공복 운동 원칙이 깨졌으므로 오늘은 실패를 베이스로 깔고 간다. 운동 가기 전까지 소화가 될 것 같지도 않으니, 오늘은 리셋도 불가하다. 이왕 먹은 거 왕창 먹어버리자. 원칙이 무너진 날은 차라리 완벽하게 무너지는게 원칙을 고수하는 방법이다.


넷플릭스 무한열차

"딱 한 편 더 보고..." 하다가 넷플릭스를 끄지 못했다. 넷플릭스 자동재생을 도입한 사람은 악마인가. 한 편이 또 한 편을 부른다. 그렇게 보고 나면 시계는 헬스장 피크 타임을 가리킨다. 4시부터 - 6시~ 를 지나면 덤벨존 거울 앞에 사람으로 다섯 겹 쌓인 헬스장은 운동 시설이 아니라 시장통이다. 퇴근길 지하철 트라우마가 도진다.


존나 귀찮

백수에겐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을 처참한 상태인 날도 있곤 하지. 그러나 샤워를 하기엔 '존나' 귀찮다. 이 긴 머리를 감고, 트리트먼트도 하고, 말리고 정리하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운동하고 와서 또 샤워하고 또 머리 감고. 하루에 머리 두 번 감는 건 백수에게 가혹한 처사다. 그러나 그냥 모자 쓰고 나가기에는... 내가 싫다. 누가 다가와서 냄새를 맡지도 않겠지만. 혹여나. 행여나... 다른 사람들한테 그 자체로 민폐일 수 있으니.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싫었다.

맑음, 흐림, 추위, 더위, 눈, 비...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혹은 날이 적당해서 문밖을 나서기가 싫다. 이건 어려서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본능이다. 비단 운동뿐만 아니라, 문밖을 나서는 매 순간이 그렇다. 학교를 다닐 때나, 회사를 다닐 때나, 학원을 가건, 남의 경조사를 가건... 매번 그랬다. (나만 그런가?)


분리불안

유독 심한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날이 있다. 운동 가방을 챙겨 들고 신발을 신는 순간까지도 시선을 붙잡는데, 이를 두고 어떻게 문을 닫고 나갈 수 있겠는가. "가지 마..." 말 안 해도 말을 하는 것만 같은 애처로운 눈빛을 두고 어떻게 두 시간이나 집을 비울 수 있겠는가. 우리 강아지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분리 불안 말이다.




갖가지 이유들로 헬스장에 가지 못하면 하루 종일 후회하길 반복한다. 아 오늘 운동할걸. 아 오늘 운동할걸. 그래도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아 내일 하면 되지. 아 내일 하면 되지.

이 모든 변명과 후회와 다짐이 한꺼번에 사라질 내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일단 잔다. 결정은 전적으로 내일의 나에게, 한번 믿고 맡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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