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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Mar 12. 2024

INTJ의 수작 방식 (feat. 환장의 ENFP)

17년지기 동성의 친구와 연인이 되었습니다.


집요한 INTJ


우선, 한 가지 에피소드가 선행한다.


2016년, 겨울.

“오랜만에 연락했는데 미안해, 곤. 여자랑 처음 사귀어봐서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어, 음. 그래. 여자랑 사귄다고…….”

“응. 주변에 물어볼 데도 없고 이걸 검색해서 찾겠니…….”

“그건 그래. 참 일이 이렇게 되네.”

“일이 왜? 너도 여친이랑 싸웠어?”

“나도 널 좋아했었는데.”

“헐. 그랬구나.”



2022년, 5월.

01.   

“화이트 와인 하나 추천을 받았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네. 집 근처랑 직장 근처 보틀 샵도 가봤는데 파는 곳이 없어.” 

“그래?”

“응. 을지로랑 홍대 쪽 바틀샵도 갔는데 없었어. 책방 주인분이 이게 그렇게 맛있다고, 여름 휴가랑 정말 잘 어울리는 맛이라고 했는데…….”

“어떤 건데?”

“1808이라는 화이트 와인이래. 와알못에 화이트 취향 아닌데도 저렇게까지 추천하시니까 궁금해 미치겠는 거야.”


02.   

“조셉, 1808 구했어.”

“엥?! 어떻게?!”

“그냥 이래저래 알아봤어. 네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니까 나도 너무 궁금한 거야. 레드도 있길래 레드도 사놨어.”

“좋겠다! 먹어보고 알려주라.”

“같이 먹자. 너도 맛보고 싶었다며.”


1808을 드디어 맛 본다는 생각에 신나서 그렇게 기깔난다는 분도 소시지까지 주문했다.


2022년, 7월.

01.   

“차 타고 가보고 싶은 곳은 없어? 내가 태워줄 수 있잖아.”

“으음, 글쎄.”

“시몬스 전시장은 어때?”

“시몬스? 거기 너무 멀어. 이천이야.” 

“그래도 가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응. 바이럴도 많이 탔고, 다녀온 마케터들도 공간 구성 꽤 괜찮았다고 해서. 압구정 쪽은 솔직히 실망스럽긴 했거든.”

“그럼 가자. 25킬로면 얼마 안 돼.”


02.   

“팝업 구경은 잘 했어?”

“응. 팝업스토어들 스타일이 좀 '익숙하게' 바뀌는 것 같더라. 오히려 이번엔 전단지 따라서 아무렇게나 들어가본 데 경험이 좋았어.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파주.”

“파주? 왜?”

“매장 콘셉트 특이한 카페가 하나 생겼거든. 오리지널 메뉴도 있고, 거기 전용 굿즈도 팔더라고.”

“헐, 가보고 싶어!”

“다행이다. 그럼 그리로 갈게.”


공간 브랜딩에 공을 들이는 카페들이 조금씩 늘어나던 시기……. 맛을 찾아간 곳이 아니다.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와, 그런데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진짜 귀신 같은 녀석일세.



2022년, 8월.

01.   

“곤 너도 대구에 볼일이 있는 거야?”

“응, 부모님 좀 뵙고 하게. 나 내려갈 때 겸사 너 태워가면 나도 운전할 때 안 심심하고 하니까.”

“아하! 그래그래. 언제 올라가?”

“딱히 일정이 정해진 건 아니라서 너 올라갈 때 같이 갈까 싶기도 하고.”

“또 태워준다고?”

“아니 뭐 겸사겸사.”

“음, 그래. 고마워!”


02.   

“아니 파롤 앤 랑그네! 이걸 어떻게 구했어?!”

“아, 그냥 근처 지나는데 마침 줄이 없더라고.”

“웨이팅 미쳐서 그냥 포기할까 했는데. 세상에.”

“운이 좋았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녀는 운만 좋은 게 아니었다.

수완이 좋은 거였다.


03.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 아니었을 텐데 올라가는 것까지, 정말 고마워.”

“나도 오랜만에 부모님 뵙고 온 건데 뭐.”

“그런데 우리 서울 올라가고 있는 거 맞아?”

“아니, 바닷가 들렀다 가려고.”

“바닷가는 왜?”

“조셉 너 동해가 좋다고 했던 것 같아서…….”


동해 좋다기에 들렀다는 칠포해수욕장. 어쩐지 서울 간다던 차가 동쪽으로 꺾어가더라.



04.   

“웬 꽃이야? 어떡해, 너무 귀엽다. 꽃들이 다 이렇게 작네.”

“응, 너 작고 오골오골한 꽃 좋아한다고 그랬던 것 같아서.”

“그런데 꽃은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응? 어제 우리 잠깐 서운한 이야기들을 했으니까…….”

“어제 뭔 얘기? 아니 설마 그거? 그거 내가 이제 됐다고 했잖아.”

“그래도 그냥 신경이 쓰여서 새벽에 꽃시장을 찾아봤어……. 안개꽃이랑 소국화 같은 걸로만 모아서 만들어 달라고.”



수입사에까지 연락해 나로선 도무지 구할 수 없던 와인을 구하고, 대구까지 편도 7시간에 달하는 길을 달려 차를 태워주었다. 퇴근 시간마다 회사 앞에 차를 대고 기다렸고, 관심이 있다고 언급한 건 잊는 법이 없었다.

수상할 정도로 모든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저장만 해놓고 못 가본 음식점이라며 데리고 간 곳도 좋았고, 브랜딩을 독특하게 한 작은 가게들에 소품 한두 개 건네는 것까지 뭐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없었다. 


대학 식물학과를 퍼스널리티로 한 이태원의 카페. 여기도 좋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계획적이었다. 곤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것, ‘관심 가질만한 장소’를 제시했다. 


이후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거지만.


다 내가 한 얘기였다. 


뭐는 별로고 뭐는 좋고, 뭘 해보고 싶고. 다 내 입으로 말했던 거였다……. 곤은 내가 호감을 보인 대상을 정리해 그룹으로 묶고 유사한 장소와 물건을 계속해서 리스트업했다고 했다.


컴퓨터냐고.


작정한 INTJ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좀 일찍 알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환장의 ENFP

연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곤이 한창 우리가 자주 어울려다닐 때 주변 친구들로부터 조셉이 네 마음 다 알면서 떠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어울려다녔던 당사자인 곤은 응. 최소한 조셉은 그냥 모르는 게 맞아. 라고 답했다고. 거기서 내 고개가 갸우뚱했다. 


“‘네 마음’을 다 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좋아한다는 거…….”

“어? 친구로서가 아니라?”

“당연하지.”

“엥? 나는 전혀 몰랐어. 절친이라 그렇게 해주는 줄 알았지.”


술잔을 들던 곤의 손이 멈춘다.


“암만 절친이라도 그렇지 야근시간까지 회사 앞에 차 대고 기다리는 절친이 가능하냐고.”

“아니 그건 이상하지, 그래도 너니까.”

“넌 그럼 여태까지 내가 우정으로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로 몰랐다고?”

“그럼! 그야 너는 날 좋아했었다고 했잖아. 과거완료형으로.”

“아니 그건 그런데.”

“정리가 다 됐으니까 나왔겠거니 싶었지. 아, 좋아‘했었’구나. 그런데 이젠 친구구나.”

“아니, 여자친구 고민 때문에 날 부른 사람한테 사실은 나도 널 좋아한다고 얘기해서 더 난장판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럼 조셉은 거기서 내가 연애 감정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말했으니까!”

“맙소사.”


다만 컴퓨터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써야 제 효과가 나오는 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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