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예리 Nov 21. 2023

마음에 하늘나라가

5. 유치원 학예회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진 겨울 해질녘.

나는 시장통 또래 여자아이들과 줄넘기 두 개로 연결해 양쪽으로 친구와 줄넘기를 넘기며 '손님이 들어왔다. 인사하고, 가위, 바위, 보!, 진 사람 나가신다, 손님이...' 흥얼거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누런 콧물 훌쩍훌쩍 들이마시랴, 줄줄 내려오는 바지 골타리 올리랴, 둔탁한 딱지 넘기려 기압 내는 사내아이 소리, 다른 한쪽에서는 사내아이가 곱돌로 삼각형을 그려놓고 그 안에 구슬 한 움큼 모아놓는다. 거기서 스무 발자국 떨어진 지점에서 동네 구술왕 종명이는 입김을 불어 옷가지에 빛을 낸 왕다마로 모든 구슬을 삼각형 밖으로 흩어놓으려 왼쪽 눈을 찡끗 감고 황다마 든 오른손을 오른쪽 눈에 근거리 원거리를 번갈아 가며 목표물에 초점을 맞춘다. 순간 산산조각 흩어진 구슬을 신나게 긁어 모은다. 영철이가 삼각선 안팎 경계 구별이 애매모호한 서 너개의 구슬은 무효라고 반박하자 이에 맞서 종명이가 떼기장 부린다며 대항한다.


시장통 골목집 굴뚝마다 뿜어 나오는 하얀 연기는 허공에서 춤 출새 없이 사라져버린다.

김치 비지찌개와 담복장 냄새가 콧 속으로 들어왔다. 저마다 놀이에 흠뻑 빠져있던 시장통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안채와 바깥채를 연결하는 쌍대문 입구로 피한다. 볼딱지와 손발이 얼얼하니 감각을 느낄 수 없다. 갈라져 따꼼한 마른 입술 위에 손가락으로 더듬어본다. 혈흔이 묻어났다.

'고-래구멍! 고-래구멍! 뚫어. 댕~엥~'

별채 텃밭 담쟁이 너머에서 들여왔다. 나는 놓칠세라 얼른 텃밭으로 달려갔다. 담쟁이 코너에 봉긋 쌓아 놓은 돌덩이 위를 딛고 올라섰다. 시커먼 때로 찌든 털모자와 두꺼운 군청색 우아기 칼라 세워 잿빛 털목도리로 입가 주위까지 칭칭 둘러 감은 굴뚝 청소아저씨는 펑퍼짐한 누비바지 차림의 고동색 인조털 테두리 장식의 검은 고무 털신으로 무장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까칠한 브러시 달린 전봇대 전선 두께만한 뻣뻣한 줄을 둥근 호프처럼 서 너번 감아 매고 '뚫어-어, 고-래구멍! 댕-엥~' 외치며 오른 손목에 걸친 깽가루 북채를 울리며 한전소 앞을 지나 소전 쪽으로 간다. 그가 사라지자 휭휭 바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저편 굴다리 터널을 뚫고 기관석 전조등을 환히 밝힌 우람한 상행선 완행열차의 경적 소리가 울려왔다. 기관석 지붕 위로 소담한 회색 연기를 뿜으며 선로 궤선을 따라 오른편 남성골 마을과 왼편 오대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정옥이네 옛날 기와집(고가) 뒤편과 성당의 뒤뜰을 휘감은 반원형 선로에서 역 플랫폼 향해 일직선을 드리며 달려오는 기차의 트랙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플랫폼에 쏟아낸 통학생들의 몸은 굼벵이처럼 오그라져 서둘어 개찰구를 빠져나와 역광장에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재촉해 걷는다. 어른 몇 몇은 역광장 다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간다.

'으-으, 추워라!'

큰언니는 샘터 빗장 대문을 발로 차 열고 부리나케 샘터와 부엌을 지나 사랑방 마루 층계 모퉁이에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는 사랑방 문을 우악스럽게 열어 젖혀 닫고는그냥 아랫목 이불속으로 양손과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으-으!' 신음소릴 낸다.

'어디 그렇게 열어서 문짝 떨어지겠냐? 아, 이것아 내복 두고 왜 안 입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다녀? 멋 차리다가 똥수칸에 빠진다는 소리 못들어? 남들은 없어 못 입것만 뭔 늠의 소관머리여?'

큰언니는 할머니의 지청구에도 언제나 여벌이다.


성탄절 앞둔 시장통은 여느 날 초저녁과는 달리 장꾼들로 부산하다.

전방 가장 앞자리에 진열된 과일 진열대에는 국광사과, 배, 홍시감, 귤이 빨간 플라스틱 그물망에 담겨 얇은 핑크 색지로 장식해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용 과일바구니들과 동양제과 종합 선물세트가 수북이 쌓여있다.

바깥채 5번 가구 굴뚝 앞으로 우뚝 선 전봇대의 누런 불빛 아래 시장통 아이들이 '도둑놈 잡기' 놀이로 가위, 바위, 보! 편을 짜느라 아우성이다. 골목대장 승식오빠가 이긴 편이 숨고, 진 편이 잡기 규칙과 숨을 장소를 정하는데 있어 대장간을 지나 고가 황씨아저씨네 뒷담장으로 서 너 마지기의 논베미가 모자이크로 펼친 들판과 수 백장의 하수구통 용도로 시멘트 원통을 찍어 놓은 태미네 벽돌장을 제한구역으로 한다. 원통에 들어가 숨는다면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태미네 벽돌집에는 태미엄마가 '삼촌'이라 부르는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가진 이상한 아저씨가 살고 있다. 그가 태미네 모든 벽돌과 시멘트 원통을 만든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한 적이 있다. 긴 쇠장대를 들고 무당이 딸랑이 들고 흔드는 것처럼 삽을 번쩍 들고는 좌우상하로 흔들며 뭐라 중얼거리리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는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조형된 원형 쇠틀에 원통을 만든다. 그가 어떻게 이상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 또한 약속한듯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

시냇가가 내려다 보이는 우리 집 철둑 밭 바로 시냇가 건너 우리 집 논베미를 가거나 또는 역전을 가려면 이 행길(태미 삼촌이 원형 쇠틀에 시멘트와 모래 배합물을 넣고 쇠장대로 꾹꾹 눌러 원통을 찍어 놓는 태미네 집 외벽으로 난 행길)을 지나가야 한다. 그날 아침도 태미네 삼촌은 시멘트 원통을 만들고 있었다. 행길에서 나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맨발에 성한데 없이 온통 구멍 난 너덜너덜한 누런 러닝셔츠와 낡고 짧은 감색 박스형 차림새였다. 어느 한 날은 맨발에 낡은 메리야스 조차 훌러덩 벗은 채 검은 나일론 운동복 바지 차림새로 시멘트와 모래 비율로 배합해 놓고는 고무양동이에 길어온 물을 부어 삽으로 잘 섞은 배합물을 삽으로 원형 쇠틀에 고르게 채워 넣는다. 그런 다음 그의 키 만한 쇠장대를 목장갑 낀 양손을 꽉 움켜쥐고는 뿔룩 튀어나온 팔뚝의 힘을 주체 못하듯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며 마치 광신 들린 사람처럼 쇠장대를 팍팍 다지는 그의 덥수룩한 턱수염 얼굴 근육에서 '피-익' 이완된 표정을 짓다가는 무슨 말을 누구에게 해대는지 얼굴 근육이 굳었다 펴졌다 그렇게 해 넘어갈 때까지 여러 장의 원통 벽돌을 찍어 놓는다. 또 다른 어떤 날이었다. 행길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눈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뛰다시피 대장간 앞에 와 멈춰 숨을 가다듬는 동안 그의 눈빛이 우리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태미네 삼촌이 만들어 놓은 원형 벽돌 주변에 새끼줄을 쳐 놓았는데 꼭 한밤중이 되면 누군가 원형 벽돌에 판내기로 똥을 싸놓는가 하면 오일 장날에는 만취한 장꾼이 방뇨로 지린내가 왕등을 한다.  


사씨아저씨 대장간을 지나 고가 황씨아저씨네 집을 지나 서 너 마지기 모자이크 논배미 양쪽으로 경운기, 탈곡기를 운전할 수 있는 샛길 따라 시냇가에 축 늘어진 한 그루의 수양버들 나뭇가지에 이르면 목조건물의 잿빛 기와지붕에 우뚝 선 십자가 꽂인 폐허의 교회건물이 서 있다.

교회 왼편으로 여인숙과 주택들이 군집해 있고 뒤편으로 역광장과 갑촌역이 위치하고 있다. 폐허된 교회 잿빛 기와지붕보다 높은 황토 토질의 둑으로 형성된 우리 집 철둑밭(철로가에 있어 철둑 밭으로 부름)이 있다. 여름에는 하루나가 온통 노란 꽃밭을 이루어 갑촌역을 지나는 상, 하행선 열차가 통과할 때마다 승객의 시선을 모은다. 철둑 밭보다 낮은 지면의 오른편 모자이크 논배미 사이로 한 사람 다닐 폭의 샛길이 나있다.

이 샛길은 철로 건너편 동네 사람들과 저 멀리 십 리 거리의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지름길로 이용한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 왔다가 밭둑 허리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을 구덩이를 발견하고는 밭둑이 내려앉게 생겼다며 다음 날 인부 고용해 밭둑 빙둘어 찔레 덩클을 심었다.


이긴 패 몇 명이 사씨아저씨네 대장간 위쪽으로 갔다는 정보을 얻은 진 패가 떼지어 추적에 나선다. 나는 진 패 따라 칠흑 같은 겨울 논바닥 썩은 볏단 한복판에 와 있다. 곰팡이 냄새가 콧 속으로 들어왔다. 

'얘네들 벌써 튀고 없잖아. 분명 신작로 교회 뒷길로 갔을거야. 우리 다시 이 길로 돌아가 얘네들 포박한다. 자, 그럼 여기서 철수한다.' 승식 오빠 명령에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우르르 뛰어간다. 나는 무리 따라 가다 사방이 온통 암흑의 겨울밤 논두렁에 덩그러니 서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저만치 신작로 장로교회 지붕 위에 우뚝 선 십자가에 달린 큰 별 주위로 빨강, 파랑, 초록, 보라, 분홍, 은색, 금색 불빛이 어울어 반짝 반짝 빛나는 광경에 멈짓 무엇에 홀린냥 부동자세다. 문득 교회 가보고 싶은 생각이 와락 몰려왔다.

'와-아! 작은언니.'

'왜그래?'

'저기, 저기 봐-아!'

'컴컴한데 뭘 보라는거야?'

'나아 도둑놈 잡기 안할래.'

'어땠든 빨리 오기나 해!'

'언니!'

'왜그래? 

'우리 저기 가보자.'

'어딜?"

'저-저기' 나는 신작로 장로교회를 가리켰다.

'뭐-어? 정신 나간 소리 하는 걸 보니 너가 많이 춥구나.'

동네아이들 따라 새로 생긴 교회 갔다 아버지에게 들켜 발바닥 회초리로 맞은 생각 안 나? 아버지 무서워하는 애가 어떻게 또 교회를 간다고 하는겨?'

'교회 앞에만 잠깐 갔다 가자. 그러면 언니가 아침 일찍 학교 간다고 금옥언니네 집에 가서 금옥언니 책가방 들어주는 꼬봉 노릇하는 거 비밀로 해줄께.'

'야! 꼬봉이라니. 그리고 너네 유치원 졸업 학예회 발표한다며 그날 유치원에서 보면 되잖아.'

'학예회는 점심 때 한단 말이야.'

'뭐어? 학예회는 왜 저녁에 안하고 날 고생시키는겨?' 작은언니가 투덜댄다.

'그럼 잠깐만이다. 정말이다. 늦게 들어가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에는 아-몰라! 아-으으, 추워라! 아무튼 빨랑 와 동네아이들 다 가버렸잖아.'

저녁 통근열차 이후 사람 발길 뜸한 신작로는 적막감에 고요하다. 나는 짙은 녹색 칠한 교회 철제 대문 앞에 선 채 교회 지붕 십자가 위에 달린 큰 별 주위로 크리스마스 츄리와 화려한 불빛 장식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성탄절 교회 안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 속으로 궁금해 하며 나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아버지 노여움 표정이 아른거린다.

'순딩아, 이러다 아버지한테 들키겠어. 빨랑 집에 가자.'

                                             

'언니.'

'쉬-잇!' 작은언니는 빗장 대문 틈새로 안채 상황을 살핀다. 샘터 양철지붕에 매달린 알전구가 켜진 체 샘터와 부엌 간 외닫이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광경은 늦게 귀가하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버지의 으름장 신호다.

'큰일났다.' 작은언니는 겁을 잔뜩 먹고있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귀가할 때는 절대 전방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규칙을 정해놓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 시간은 전방 문짝 3분의 2를 닫아 놓은 폐문 시간으로 가게 문지방 앞으로 진열된 물건 전부 가게 안으로 보관해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방 아랫목에 앉아 하루 종일 장사한 돈과 장부 마감을 마친 시간이다. 별채 쌍대문 빗장은 바깥채 세 사는 다양한 사람들 출입으로 잠궈 놓지 않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안채  집안 모든 문은 아버지가 단속하고 잠자리에 드신다. 작은언니는 빗장 대문 틈새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손가락 끝자락이 맞물린 빗장에 달랑 말랑 끙끙거린다. 시린 손을 입김을 불었다가 겨드랑에 넣었다를 몇차례 시도하다 마침내 툭! 빗장 열린 소리에 안도감을 만끽한다. 

'아싸! 열렸다.'

반가움도 잠시 작은언니는 애써 자제하며 내게 속삭인다. 극도로 조심하여 안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온 힘을 다해 소리 나지 않게 빗장을 걸고 살금살금 샘터에 들어서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댄 작은언니와 나는 살금살금 뒤꿈치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내딛는 찰나 아버지의 우렁찬 헛기침이 들려왔다. 우리는 샘바닥에 그대로 늘어 붙었다.

'으-으, 어-어떻게? 우리는 겁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본다.

'이리 오너라!'

얼어붙은 체 우리는 안방 윗목에 서서 고개를 떨군 발가락에 초점을 맞추고 양손은 깍지 껴 배 위에 올려놓는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 고개가 뻐근하고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다.

'이 밤중까지 싸돌아 다니도록 집 보다 좋은 곳이 있는가?'

당연히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이 천당이라고 했다.

'어디 있던겨?'

'없어유.' 하고 넙쭉 대답해야 하는데 우리는 약속한 듯 꿀 먹은 벙어리다.

나는 심장이 콩캉콩캉 뛰어댔다.

'아, 대답혀봐!'

아버지 고성에 나는 왕창 쪼그라들었다.

'저-어, 아버지...' 하고 속으로 겨들어가는 작은언니 목소리는 이내 말문이 끝긴다.

'뭔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께 순딩이가 말혀봐!'

쌀쌀맞은 아버지 말투에 나는 기절할 것 같다.

'........'

'아, 곰이여? 왜 말을 못 혀? 이 곰예야!' 한 옥타브 높아진 아버지 목소리에 나는 그만 눈물을 쏟는다.

'동네 얘들과 놀다가 집에 오는 길에 신작로 교-외 앞에.....' 작은언니는 스타카토에서 안단테로 끝을 흐지부지하고 만다.

'뭐-이여? 죄 짓고 교회 들어가 빌고 나와 또 죄 짓고 들어가 비는 사람들 들락거리는 그런늠의 예배당 왜 가는겨?'

'.......'

우리는 그저 죽었구나 하고 서 있을 뿐이다.

'다시 경고혀. 교회 근처도 얼씬거리지 말어. 알아들어?'

얼음도 깨질 아버지의 날카로운 언성에 우리는 약속한 냥 '예에' 하고 합창을 한다.

'건너들 가 봐!'

우리는 꼼짝 달싹 못한 채 아랫배 앞으로 꽉 움켜 쥔 양손을 그제서야 풀었다.


아버지가 두번째 내린 교회 금지령이다.

안방에서 나온 작은언니는 내게 골랐는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큰언니와 함께 자는 사랑방으로 홱 들어가 버린다. 나는 시들은 무우잎파리처럼 늘어진 몸으로 건너방으로 들어간다. 성주는 아랫목에서 곤히 자고 있다. 할머니는 윗목에 앉아 껍질 벗긴 도라지를 면도칼로 얇게 가르고 있다.

'니아버지한테 지청구 먹은겨?'

'하-할머니. 아버지는 왜 예배당 싫어하는거야?'

'나는 울먹은 소리로 묻는다.

'아, 니아버지가 야기하잖여. 딴게 아녀. 나쁜 마음씨로 예배당 다니는 사람을 질색하는 것이 아닌게배. 그러니께 니아버지 니어머이는 예배당 다니지 않아도 뭐든지 양심에 찔리지 않는 일을 하면 하늘 무서울 게 없다는 것이여.'

나는 큰 하품을 한다. 할머니 말이 어렵고 이해를 못한다.

'낭중에 순딩이가 크면 니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알 때가 있을껴.'

'할머니. 근데 아버지는 왜 나를 교회 유치원에 다니게 하는거야?'

'근게 그게 뭐시여, 교회도 공장에서 지은 사택가잖여. 신랑들이 공장에서 다 높은 자리에 있고 마누라들도 다 공부 한 여자들이랴. 배운 여자들이니께 자식들 생각혀 유치원 세우자고 입을 모았는데 교회 유치원 차린 사람이 중획교 음악선생 마누라랴.'

나는 할머니 말에 전신의 냉기가 풀리는지 쏟아지는 졸음에 눈까풀이 가물거리더니 깊은 꿈나라로 몰아갔다. 할머니가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쯧쯧' 여린 마음에 호통을 쳐놨으니 또 얼마나 오래갈까나? 할머니 음성이 가물거리며 사라져 버린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흰 눈은 온 동네를 하얀 세상으로 바꿔 놓았다.

골목길 전봇대 불빛 아래 흰 눈은 마치 보석광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장통 사람들이 입김을 펄펄 날리며 저마다 가게 앞 종아리 높이로 쌓인 눈밭을 밀대로 밀어붙이고 싸리빗자루로 쓸어댄다. 시장통 군데군데 밀어붙인 눈덩이를 삽질로 리어카에 퍼담아 시장통 뒷골목 도랑에 쏟아붓는다.

아버지는 목장갑 두 켤레를 겹쳐 끼고 전방 문짝을 떼낸다. 사랑방 마루에 광목천으로 덮어 놓은 국광 사과, 배, 홍시감 든 궤짝 하나씩 전방 제자리에 진열해 놓는다. 이어 생선궤짝 진열된 생선대 오른쪽으로 담복장과 비지 담긴 고무 대야 나란히 콩나물시루와 두부 잠긴 물이 살얼음 돼버린 양은 다라를 마지막으로 갖다 놓는다.

'아, 뭔 늠의 오바를 숨도 못 쉬게 맞춰서는 아침밥도 못 먹고 가는겨? 참말로..'

'할머이 나아 가유.'

'장갑은 또 어디다 두고 맨 손인겨?'

큰언니는 책가방 뒷면 쟈크를 열어 검정 가죽장갑을 꺼내 끼며 줄행랑치듯 역전으로 달려간다. 샘바닥이고 별채 안마당이고 꽁꽁 얼어붙었다.


날이 새고 시장통이 훤해지자 머리에 보자기을 쓰고 두툼한 머플러로 목을 둘둘 감은 역전 신작로 유리집 아주머니가 호빵 만한 담복장 한 개와 두부 한 모을 주문한다. 어머니가 양은 다라 표면의 살얼음을 나무주걱으로 톡톡 깨서는 고무장갑 끼고 한 모 건져 신문에 말아준다. 두 번째 손님은 중학교 입구, 산내기 꼬는 집 아주머니가 콩나물과 대파를 구입해 간다. 우리는 안방에서 한참 아침 식사 중이다. 부모님은 식사 중에도 아주머니 한 분이 생선대 앞에 서서 어떤 생선을 구입할까 망설리는 광경을 돋보기처럼 한 안방 유리 미닫이문 통해 보고 있다. 아버지는 구입해 갈 사람이라고 확신하듯 안방 문을 드르륵 열고 전방 생선대로 나가신다.

'중간치로 한 마리 주셔유.' 하는 아주머니 입모양이 보인다. 아버지는 고등어, 오징어, 동태와 나란히 진열된 확고짝 머리맡에 끼어놓은 목장갑을 낀다. 생선대 난간에서 생선칼을 빼내어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동태 궤짝에서 중간치 동태에 칼날을 꽂고는 칼자루에 힘을 가해 몇 번 들썩들썩해 떼낸다.


늦은 오전

시장통 아이들이 하나, 둘 골목길에 모여든다. 한 움큼의 눈을 양손으로 꼭꼭 모아 뭉쳐 눈바닥에 굴려 바위처럼 부풀려서는 판때기 조각과 나무 막대기로 조각가인냥 두드리고 다지고 깎은 눈사람 얼굴에 숯을 박아 골목길에 세워 놓는다. 다른 한쪽에서는 미끄럼틀 만들어 그 위에 물을 부어 얼게 한다. 동네 아이들은 서로 먼저 타려 아우성이다. 여러 명이 번갈아 타버린 미끄럼틀은 금세 반질반질 빛이 났다. 문득 나는 거기에 나무판대기 올려놓고 타면 씽씽 더 잘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른 별채 곳간으로 뛰어가 분해해 놓은 생선궤짝 판때기 한 편을 가져와 미끄럼틀 위에 놓고 탄다. 훈표와 창회가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순딩아, 오늘 유치원에서 뭐하는 날이잖여. 갈 준비혀' 할머니가 대문을 통해 외쳐왔다.

'네. 할머니.' 나는 얼른 대답하며 안마당에 들어서는데 눈언저리로 뭔가 번쩍이었다. 뭔가 싶어 하늘 향해 고개를 들자 별채 양철지붕 채양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마다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다. 바깥채 초가지붕에도, 돼지우리와 곳간 스레이트 지붕에도, 전방 양철지붕 채양 뱅돌아가며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에서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나는 안채 부엌으로 뛰어간다.

'할머니 나 고드름 따고 싶어라!'

'원, 아이두.'

할머니는 땔감광에서 장대 싸리빗자루를 들고 나온다.           

'워떤 늠 할겨?'

'할머니 잠깐만.' 나는 샘터 양철채양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을 쭈욱 스캐닝한다. 크기도 모양도 맑기도 모두 다 달랐다.

'할머니 이거요.'

장대 싸리빗자루로 감싼 고드름 따기 전 할머니가 다시 내게 선택한 고드름을 확인한다.

''이늠인겨?"

'응 할머니. 부러지면 안돼요.'

'뚝!' 소리가 들렸다.

하얀 양초대처럼 날씬하고 매끄러우며 티끌 하나 없는 크리스털 고드름이다.

나는 하모니카 연주하듯 고드름을 입술에 문질러 보고 빤히 들려다 본다. 이리저리 돌려봐도 고드름 속은 아주아주 맑았다.

'그러다 입술 벨까 무섭다.오늘 유치원서 성탄절 뭐한다며? 어여 손 씻어. 점심 상차려 갈겨. 밥 먹고 찬찬히 유치원 갈 채비혀야지.'

'네에. 할머니.'

어디에 고드름을 간직해 놓을까 나는 망설인다. 두툼하게 쌓인 장독대 항아리 뚜껑이 불쑥 떠올랐다. 장독대에서 내 키보다 훨씬 큰 조선간장 항아리 뚜껑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속에 고드름을 꼭꼭 덮으며 속삭인다.

'고드름, 고드름. 오늘 성탄절 학예회에 내가 맡은 여자 호랑이 역이 하늘 땅땅 만큼 싫어. 그리고 내가 다른 여자 아이들 키 보다 크다고 호랑이 역을 준 선생님도 싫어. 그리고 나와 친하지도 않은 호랑이 남자 역 맡은 인범이도 싫어. 그래서 연극 연습할 때마다 정말 하기 싫었어. 어떻게 성탄절 학예 발표회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고드름 빛이 성가스런 마음을 싸악 가시게 해줬어. 내 말은 말이야. 맑은 고드름 속처럼 아무것이 없어야 빛이 나는구나를 알았어. 사실은 여태 나랑 가장 가까운 우리 할머니와 나비한테도 내색할 수 없어 혼자 끙끙댔거든. 고드름! 부디, 내가 싫어하는 호랑이 부인 역 맡은 성탄절 학예회 잘해 낼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고드름을 덮고 또 덮고 토닥 토닥 옆 항아리 뚜껑에 쌓인 눈까지 덤으로 두둑이 덮어 놓는다.


할머니는 옆 가름마로 나의 이마를 훤히 노출해 가르고 앞머리를 실핀으로 고정한다. 내복 차림의 나는 독고리와 누비바지를 입는다. 그리고는 번들거리는 하얀 레이온 질감의 걸방 속치마를 걸친 다음 사각사각 소리 나는 짙은 솔잎색 공단 치마를 입는다. 그리고 옷고름과 소매에 색동으로 장식한 앵두색 빨간 공단 저고리로 단장한다.

'이리 입혀놓으니까 천상 니아버지여!' 할머니가 또다시 천상이라며 탄식한다.

한복은 시장통 천일 포목집에서 성탄절 학예회가 끝나고 한복 차림의 졸업식 사진 촬영이 있어 특별히 맞추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학예회에 올까나?'

'성탄절이라 가게 많이 바쁘잖여.'

부모님에게 장사가 우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물어 보았다. 나는 조금 시무룩할 뿐 떼를 쓰거나 칭얼거려 본 적도 또 할 줄도 모른다. 나는 두툼한 양말을 신고 그 위에 하얀 버선으로 겹 신는다. 마지막으로 팥죽색 인조 밍크코트를 입고 털신으로 완전 무장한 차림새로 가게 전방을 나선다.

'순딩아, 길바닥 미끄러우니께 선생님 따라 조심히 걸어가야 혀.'

'네에, 할머니.'

'투정 부릴 줄 아나, 그저 그려려니 받아들이는 어린 것이 기특도 하지. 그래도 누가 갔다 와야 하는디...' 혼자 말로 할머니는 순딩이를 측은해 한다.

나는 좋은 돌 가게 앞을 지나 돼지네 막걸리집과 청포 가게 앞을 지나 극장 골목길을 이용한다. 극장 앞 광장에 이르자 맞은편 신화 약국 유리문 외벽 앞에 몇몇 친구와 그들 어머니가 나와 계신다.  


오후 3시.

성결교회 이층 강당 홀에는 현기증 날만큼 관객들로 꽉 차 있다. 유치원에서 가장 우량한 인범이와 호랑이 부부역 맡은 나는 무대 뒤에서 곧 막이 오르길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장독대에 숨겨놓은 고드름 생각하며 학예회 무사히 잘 마칠 수 있게 기도한다. 막이 오르는 음악이 흐른다. 무대 자주색 벨벳 커튼이 양쪽으로 서서히 주름잡히며 막이 열린다.


호랑이 가면 쓴 인범이와 나는 손을 잡고 무대 중간으로 나간다. 많은 관중석 사람들에 겁을 먹어 머리에 아무 생각도 첫 대사도 떠오르지 않는다. 인범이가 내 손을 툭툭 흔들어 신호를 준다.

'토끼야, 토끼야. 이리오너라!

네가 가까이 오면 내가 잡아먹겠다.'

변성한 인범이의 호랑이 목소리인 반면 나는 아무 감정 없이 속삭일 뿐이다. 무대 저편에서 안무하는 선생님이 큰 목소리로 외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호랑이 부부가 입맛 다시는 흉내를 낸다. 그리고는,

'으-어흥! 토끼가 나타나면 잡아먹어야겠다. '

하고 인범이와 함께 외치고는 무대 모퉁이에 세워 놓은 숲 속 무대 소품 뒤로 쪼르륵 달려가 웅크리고 앉아 토끼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어 토끼 마스크 쓴 친구들이 무대 중앙으로 우르르 나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똘똘 뭉쳐 있는다.

'어머, 어쩌나! 가엾은 토끼들아.'

관중석에서 토끼들에 동정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으-르렁, 으-르렁!'

호랑이 부부가 굶주려 몹시 배고픔을 알리며 토끼들 앞에 덥석 나타난다. 토끼들이 기겁을 하며 놀란 표정과 동작을 한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호랑이님.'

토끼들이 구원 합창을 한다.

'호랑이님, 호랑이님! 살려주세요. 저희들 살려주시면 다음, 이 다음 영원히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토끼들이 애원으로 합창한다.

'어-흥!'

간청하는 토끼들의 진지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굶주린 호랑이 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흔든다.

'오-호, 토끼들아! 우리는 한 겨울 내내 굶주려 너희들이 내 먹이로 밖에 안보이는구나, 어-으흥!'

단호한 호랑이 부부의 언포에 두려움에 떠는 토끼들은 안절부절 허둥댄다.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상의를 한다.

'호랑이님, 호랑이님. 저희들이 열심히 일해서 준비해 놓은 음식 드릴테니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흥! 감히 숲 속의 왕을 토끼가 얒잡아보다니 내 당장 혼구역을 내줄테다. 어-어흥!'

'호랑이님, 화내지마세요. 저희가 어떻게 숲 속의 왕 호랑이님을 얕잡아 보겠어요. 저희에게 조금의 사간을 주시면 우리 토끼가 열심히 일해 모아둔 음식을 드리겠습니다.'

호랑이 부부가 휘둥그레 서로 마주 본다.

'오-오, 여보 호랑이님. 우리가 먹을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니 토끼들을 살려주세요.'

'아, 그럼 토끼들이 모아 둔 음식 먹을까요?'

'네-에. 여보호랑이님.' 떨리는 부인 호랑이 목소리다.

'와아-와아! 호랑이 최고! 호랑이 최고!' 관중석 환호와 박수갈채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린다.

호랑이와 토끼들은 무대 분장실로 쪼르르 퇴장한다.

'애들아, 모두 아주 잘했단다.'

선생님 두 분과 몇몇 학부형들이 분장실로 들어와 우리를 안아 주었다.

'어린이 여러분, 곧 산타할아버지 선물 증정식이 있습니다. 증정식이 끝나면 한복 차림으로 졸업사진 촬영할 거예요. 한복으로 갈아 입을 때 어머니들께서 도와 줄 거예요. 알았죠.' 하고 인범이 어머니 아니, 선생님이 콧소리로 외쳐왔다. 이때 성탄절 노래가 들려왔다.


'흰 눈 사이로 달리는 썰매...

징글벨~ 징글벨~'


한복 차림의 우리는 무대 성탄수 앞에 모여 앉아 노래 부르며 산타할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무대 저편에서 키가 전봇대처럼 크고 마른 체격의 산타할아버지가 굽은 어깨에 가득 든 빨간 자루를 질머지고 뒤뚱뒤뚱 우리가 앉은 무대 성탄수로 다가와 빨간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문득 산타할아버지가 두 마리의 루돌프 사슴 앞장 세워 빨간 자루에 크리스마스 선물 한 가득 실은 썰매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느 집 굴뚝 타고 들어와 자는 어린이 머리맡에 선물꾸러미 놓고 사라지는 그림책이 떠올랐다. 나는 성탄절 선물을 그렇게 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산타할아버지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아주 낯이 익은 사람이다. 산발한 흰머리에 빨강 모자 쓴 산타할아버지의 매부리코 등에 메추리알 만한 은테 안경을 떨어질 둥 말 둥 걸친 덥수룩한 긴 흰 턱수염은 얼굴 거의 덮고 있다. 

'이성요' 하고 선생님이 외쳐왔다. 나는 아주 수줍워하며 산타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빨간 자루에서 선물상자 하나를 꺼내어 다른 아이들처럼 '오-호-오!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내게 준다. 나는 선물상자에는 관심 없듯 산타할아버지 얼굴만 뚫어져라 본다.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이다. 산타할아버지 선물 증정식이 끝난 우리는 졸업 사진 촬영장인 유치원 놀이터로 내려가 준비된 앞뒤 둘 줄의 의자에 키 작은 친구가 앞줄에 앉고 키 큰 친구들이 뒷 줄 의자에 선 우리 양쪽으로 두 여선생님이 서 계신다.


'자, 어린이 여러분! 여기 아저씨가 하나, 둘 하면 토-끼! 하고 스마일 하세요.'

사진사 아저씨는 맞은편 삼각 카메라대  받쳐 시꺼먼 헝겊을 뒤지어 쓰고는 우리 향해 외쳐왔다.

'자, 어린이 여러분! 좋아요, 아주 좋아요.

그대로 움직이지 말아요. 찍습니다.

하나, 둘 토끼-이~

펑!'

   

  

          

           

      


   


작가의 이전글 마음에 하늘나라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