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단순한 줄 알았죠. 그때는요.

내가 드라마에 빠져든 순간

by 여름

선생님은 왜 그렇게 투덜대세요?

아니, 재산 있으시지 명예 있으시지

인기 있으시지 세상에 부러울게 없는데

늘 뵈면 그닥 행복해보이시질..


재산, 명예, 인기 그거 있음 다 행복해?

누가 그래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강남에 십층이 넘는 빌딩이 한두어채 있구

속 썩이는 자식 없구

매일 쇼핑이나 하면서 살면 좋지 않나?


돈 밖에 없구 살가운 자식은 커녕

속 썩이는 자식도 하나 없구

매일 할 일은 쇼핑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단순하셔서

무슨 인생을 논하는 드라마를 찍으시겠다고.

<그들이 사는 세상- 노희경 작>


신문에 매일 나오는 티비 편성표를 외우는 아이였다. 나는 티비를 좋아했다. 만화도 드라마도 예능도 좋아했다. 기대하는 프로가 시작되기 전, 나의 마음은 누구보다 들떴었다. 그렇게 티비를 끼고 살던 아이는 드라마를 가장 애정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부터, 저거 지루해서 못 보겠어 하는 드라마까지 나의 드라마 취향은 종잡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열혈 시청자가 되곤 했다.


그 중에서 최애를 선택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두 드라마를 뽑을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사는 세상>, 또 하나는 <연애시대>. 두 작품 모두 내가 20대 때 방영되던 드라마였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왔다. 그리고 틈만 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내게, 책이 아닌 방법으로 인생을 알려준 것들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훌쩍 지나고 있음에도, 드라마를 보던 그 밤의 내 마음이 생생하다.


나는 방송국을 동경했다. 아마 실상을 몰랐으니, 방송국에 대한 헛된 기대가 있지 않았나 싶다. 방송국을 직장으로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 그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연예인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 그 세 가지 모든 것이 나에게는 유니콘과 같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과 같았다.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방송아카데미를 다니고 이력서를 넣으며 많은 고민을 하던 시절, 드라마를 만들며 현장에서 일하는 극 속의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20대의 인생은 어떨까? 보나마나 서툴고 짠맛이다. 무언가를 덜 넣으면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요리에 욕심껏 때려넣다보니 입에 넣을 수 없는 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헛발질하는 20대의 만남과 헤어짐, 일에서 오는 희열과 스트레스가 그 시절 나는 두려웠다. 그런데도,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 인물로 분해 살고 싶다는 상상을 매번 했다. 그리고 회차가 거듭될 수록, 극 속의 모두가 나보다 어른이라고 느껴졌다. 각자의 부대낌을 안고 살아가는 것 자체로 그들을 존경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들쭉날쭉하던 내 감정선은 주인공인 지오(현빈)와 준영(송혜교)을 따라서 울고 웃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에게 남겨진 건 바로 민숙(윤여정 배우)이었다.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는 시기에 돈도 배짱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시절, 나는 돈만 있다면 다 해결된다는 단순 무식한 생각에 사로 잡혔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는가? 돈이면 다 된다고. 살면서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을 보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돈으로 해결되는게 인생에서 가장 쉬운 해결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걸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 더 걸렸다.


가난한 집에서 그저 순진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를 볼 때, 지오는 답답했다. 세상 밖으로 나와서 준영을 만났지만, 부잣집에 콧대 높고 기세등등한 준영은 그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우월한 사람이었다. 사랑의 크기에 상관없이, 단순히 지오와 준영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랐다.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다른 노선을 달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오의 저 말이 이해가 된다.

선생님은 다 가지셨는데, 왜 불만이 많은가요?( 우리 엄마처럼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도 않고 아버지랑 싸우지도 않아도 되고 나같이 속썩이는 아들도 없는데 말이죠. 나가서 카드 한 장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데, 속 끓일 일도 없이 혼자 고상하게 지낼 수 있는데...) 아마 지오는 이렇게 괄호 안의 말들을 삼킨채로 민숙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지오와 같은 생각을 하던 사람이라, 민숙의 대답을 듣곤 가슴이 뜨끔했다. 돈밖에 없고, 기대고 정나눌 자식 하나 없고, 할 수 있는 건 쇼핑 뿐이라면 행복할까? 지오의 말을 그냥 똑같이 뒤집어서 답했을 뿐인데, 그 간에 돈만 해결되면 당장 내 인생은 화려한 꽃내음을 풍기며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승승장구하면서 치졸하고 짠내나는 과거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시쳇말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멋지게 불타고 싶었던 청춘. 그것이 내가 저 깊숙히 품고 있었던 나만의 유리구슬이었다. 다행히 민숙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다음, 와장창 깨졌지만, 그 유리구슬이 깨지기 전까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돈이 없고 빌딩이 없어도 행복한가? 지금 누군가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라고 답할 것 같다. 살아가는데에 돈은 꼭 필요해서 그거 없이도 행복해? 라고 물으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단편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제는 (무지개색정도는 아니어도) 흑백에서 대여섯 컬러로는 바뀌었다고 확신해서 말할 수는 있다.


평면이 선사하는 단순한 안정감은 내 인생에 필요하다. 허나, 인생은 다채롭고 굴곡까지 있어서 모양을 자주 바꾸며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매번 단순한 인생만 찾으면서 뒷걸음질 칠 수는 없다. 강남에 빌딩이 없고, 매일 쇼핑할 여유가 절대 되지 않아도 나에겐 속썩이는 자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보이는 행복이 전부라고 믿던 시절에서 당장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행복을 힘을 내서 찾아보는 오늘이 오기까지.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쓴다면, 이제는 16부작 정도는 거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랑했다가 미워하며 돌아섰던 수많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이제는 오롯이 내 탓도 그들의 탓도 아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민숙의 말처럼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로 나를 덮어두기엔, 나는 실로 많은 것들을 새로 알아간다. 그리고 철 지난 것들은 잊어버린다. 새로이 쌓이는 것만큼 오랜 것들은 밖으로 빠져나가서 균형을 이룬다.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나는 20여년이 다 되도록 저 장면을 쉬이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귀찮아서 단편 렌즈를 끼고 상대를 바라보고 싶을 때마다, 굴곡을 주는 렌즈로 갈아끼우고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이제 오래된 렌즈는 할 몫을 다했다. 드라마가 못난 나를 가르치면, 나도 누군가를 덜 오해할 수 있겠지. 작품 속 몇 줄의 대사가 환갑이 되기까지, 부족한 나를 채워주리라 믿어본다.


이제는 모자무싸(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박해영 작)를 기대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기다릴 시간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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