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사랑한 캐릭터 - 슬의생 추민하
'다정도 병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쓰는 부류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다정한 사람을 탓하는 다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주로 "그거 병이야~ 그렇게 당해놓고도 잘해주냐!" 라는 대사를 사용한다. 그 다음은 그 말을 듣는 다정한 사람인데 "다정도 병이지. 으이구." 하면서 뒤통수 맞은 자신을 탓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다정함을 잃지 못하는 당사자다.
다정하다는 말은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거나 정분이 두텁다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다정하다'는 '사랑이 많다'라는 말로도 동의어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다정한 사람은 힘든 나를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몇 명의 '다정한 사람'을 만났고, 나는 시기마다 다시 힘을 얻어 미지근하고 다정한 아줌마가 되었다.
다정함의 보은을 입은 내가 뽑은 주인공은 바로바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추민하 선생(배우 안은진)! 그녀는 뒷담화는 안 하고 앞담화를 하는 스타일이다. 일도 잘하고 싹싹하다. 메이크업을 잘 하지 못해서 매번 놀림을 받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새로운 스타일을 도전하는 챌린저이기도 하다. 거침없지만 뒤통수는 자주 맞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맑고 다정해서 누구나 웃음짓게 만든다.
초록색 쉐도우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화면에 나타나서, 산모를 위하는 그녀는 열정도 많고 에너지가 넘친다. 모두에게 솔직한데 그것이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그런 모습이 나에게 참으로 와닿았다. 사람이 솔직하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인데 추선생은 그걸 해낸다. 그리고 얄미운 동기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제자리를 지킨다. 내가 나이가 더 어렸다면,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고 저렇게 고생만한다고 혀를 끌끌 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손해 본다고 선택한 길들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후에 교수가 된 추 선생을 보고 나 또한 감격해서 울컥한 기억이 있다.
전형적인 K장녀인 나는 겉치레로 아는 사람들이 '다정하다'라고 말하고, 속깊이 아는 사람들은 '츤데레'라고 말한다. 나는 다정을 들키는 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다정함을 정해놓고 그것을 나눈다. 다만, 나의 다정함은 이기적이라서 내 마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하다. (사람의 도리로, 길에서 공을 흘려보낸 고딩들에게 공을 주워주는 정도의 인류애적 다정함도 포함한다.) 감정적으로 다정하다기보다는 무심하게 챙기는 것이 나의 다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다정함'을 잘 알지 못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 번의 다정에 손사래를 치면서 부담스럽다고 나오면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주고받는 감정이란 건 참으로 큰 격차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아끼고, 아이가 생겨서 부모가 된 이후에는 어디서 무슨 이야기가 잘못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한다. 내가 그냥 무심코 던진 말이 소문이 되어서 어느 날 "저 엄마(저집 애) 좀 이상해."가 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한 후로는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래서 나는 추선생이 귀엽고 부럽다. 해맑게 '뒷담화는 안 하고 저는 앞에서 이야기해요' 라고 말하는 당당함이, 자신을 두고 며칠 째 나오지 않고 잠수중인 동기가 미워죽겠다고 말하면서도 다음날 교수님께 커피를 웃으며 사다드리는 책임감이, 교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미련스러운 순애보가. 그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알록달록한 펠트작품같다. 하나밖에 없는 것인데, 그 어울림이 신기하게 맞아 떨어져서 아름다운 것처럼.
주로 다정한 인물은 속이 깊고 조용해서 말없이 다른 사람을 챙기는 스테레오 타입이 많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발견한 추선생은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며, 내 썩어들어가는 속도 가감없이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생동감있게 살린다. 그런 류의 다정함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배우 안은진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그녀가 좋아졌다. 대학동기인 배우 김고은은 한 인터뷰에서 은진이는 미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걔는 어디가서나 사랑받을 사람이다. 라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를 싫어할 사람이 없다니! (나를 좋아하기까지 바라지도 않는) 나같은 인간에게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어떤 의미로 정말로 복받은 일이기에 그녀가 더 궁금해졌다.
특히 <언니들의 산지직송>에 나와서 염정아, 박준면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더욱 반하게 된다. 너무도 예쁜 사람이 많은 연기과 학생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학생을 따라하며 '노력'을 해 봤다는 안은진!
자신은 결국 야! 우리 술먹으러 가자! 하며 앞장서서 어야둥둥하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회탈 웃음을 지으며 할 때, 그녀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대부분 솔직하지만, 그 솔직함에는 단계와 수준이 있다. 상대에 따라서 나의 모드는 바뀐다. 그리고 다정함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고 다정하다는 말을 내 앞에 수식어로 붙이기에는 좀 모자란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면서 기쁨과 슬픔, 환희와 실망이 다 드러나는 추선생과 그 추선생의 원래 모습인 안은진이 부러웠다. 저렇게 감정을 대놓고 표현하는데도 적이 없다니! 저 사람이 가진 타고난 사랑스러움은 무엇일까? 닮고 싶어도 닮을 수 없는 영역이다.
미지근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금, 쥐어짜낸 다정함을 아이에게 저녁 샤워 후 로션처럼 발라주고, 억지로 남편을 안아주며 사랑해 잘 다녀와하고 아침 배웅을 한다. 다정하다기엔 감정의 기본 온도가 낮고 말투는 상투적이며 딱딱하다. 그래도 추민하를 생각하면서 노력한다. 내 아들이 나중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틈이 좀 있어도 맑고 가벼운 사람을 택했으면 해서. 틈이 있으면 흠이 될지도 모른다며 뒤를 자꾸 돌아보는 나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해서.
나의 태생적 부족함은 말이라도 (행동은 굼떠서 속터짐) 다정한 남편과 기분이 가라앉은 나를 향해 "뽀뽀해도 돼요?"라고 물어주는 아들이 채워주고 있다. 다정은 병이 맞다. 당할 걸 알면서도 정을 주고, 울 일이 생길 걸 또 까먹고 마음을 허락한다. 그래도 어쩌겠나. 세상은 무균상태가 아니라서 이런 저런 병을 겪으며 몸이 면역을 가지듯이, 인생도 비슷한 모양새인걸. 내 다정함은 미지근하지만 차갑지는 않다. 그렇게 온 세계, 여러 온도의 다정이 모여서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살게 한다. 그러니, 다정한 사람을 혼내지 마시라! 태생이 그런 것을 그들도 어쩔 수 없으니!
이쯤되니 궁금하다. 다정은 병일까 아닐까? 그리고, 다정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은 지금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