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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drink Jan 27. 2021

그 아이(2)

지금도 생각나는그 날의 살랑거림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자식사랑이 끔찍했던 아버지. 말 없이 소눈망울 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와 오빠가 다니던 학교는 군인자녀들을 모아 놓은 특수 초등, 중학교 였다.  군인들 세계에서는 계급이 다인지라, 학부모 사이라도 계급에 따라서 상관에게 깍듯해야 했다. 계급대로 배정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놈의 ‘사모님’ 소리가 그렇게 싫었다.  일년에 한번씩 있는 진급 발표가 있는 날이면 학교까지 뒤숭숭했다.  1-2 년 있으면  심지어 몇개월 지나 다른 보직을 받고 이사가는 일 쯤이야 보통 있는 일이었다.  보호와 배려차원에서 나라에서 만든 이 특수학교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다양성의 결핍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과 어느 새로운 곳에 가더라도 발현되는 뛰어난 적응력이었다.  사춘기와 대학생활을 지나며 아니 심지어 결혼해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고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 이런 점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가을날였다.  곧 있을 체육시간을 위해 운동복으로 갈아 입느라 교실전체가 시끌벅적하고 분주했던 그때,  수진이가 창문밖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흥분하며 소리쳤다.새카맣고 숱이 많은 까만머리에 하얀 얼굴, 그리고 뿔테 안경을 쓰는 재미있는 친구였고, 나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얘들아, 쟤 내가 찍었으니까 아무도 건들지마. "


나는 교복치마 밑으로 운동복을 다리한짝 끼워 넣고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 쪽으로 나 있는 창문가로 쪼르르 달려가 매달려서는, 수진이가 찍은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까치발을 하고 보기 시작했다. 키가 보기 좋게 큰,  못보던 남학생이 쉬는시간에 나와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어.. 전학 왔나보구나, 에휴, 당분간 수진이 때문에 시끌하겠구나. ‘  이내 난,  체육복 갈아 입는게 참 귀찮구나 생각하며 늦지 않으려 서둘렀다.  수진이의 이성에 대한 열정은 늘 뜨거웠다. 그 대상이 동급생이건 선배이건, 선생님이건 아니면 만날수 없는 가수 오빠들이건  그들에 대한 열정이 늘 강렬하기도 하고  자주 바뀌었다. 누구를 좋아해도 마음으로만 앓곤했던 나와는 다른, 수진이의 에너지 가득한 성격이 부러웠다. 수진이를 따라 공일오비 테이프를 처음 사서 들어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고등학교 오빠들을 창문에 기대어 한참을 보기도 했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할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며칠 지난  오후, 출석부를 가져오시는 걸 잊으신 수학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안쪽에서 문이 먼저 열려 하마터면 어디든 상처가 날뻔했다.

 

"어? 미안해."


 ‘그 아이’ 였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수진이의 ‘그 아이’ 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선가 본 낯익음이, 열려있는 복도창문 덕분에 불어오던 여름 끝자락의 선선한 바람보다도 그 찰나를 가득 채웠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을 오르면서 그리고 기다란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멈출수가 없었다. ‘아버지 따라 전학 다니다가 어디선가 봤나, 어디였을까?’ 생각이 막 깊어질 즘에 교실에 다 다랐다. 교실문 안쪽의 세상은 달랐다. 군데군데서 만들어지는 중 3 여학생들의 수다는 나의 ‘그 아이’의 흔적을 찾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날 이후로  난 수진이의 ‘향단’이가 되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귀챦은 일이 시작된 것이다.


“은주야.. 오늘 꽃하고 이 편지좀 걔한테 좀 갖다 주면 안될까? 은주야.. 제발 제발..”


나도 창피하다고 그러면  같이 가기도 했다. 수진이는 적당한 곳에 숨어서 ‘그 아이’가 나오기를 목을 길게 빼고 눈이 빠지게 보곤 했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다른 남자아이에게 ‘그 아이’ 불러주기를 부탁하고는 모퉁이쪽을 돌아보면, 수진이의 얼굴엔 어쩔줄 몰라하는 긴장감이 몇배가 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보통은, 내가 ‘향단’이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방자’가 되어버린 남자아이가 나와서 꽃과 쿠키 편지등을 받아가곤 했다.  그러다 어쩌다 한번 ‘ 그 아이’는 그것들을 받아 갈때가 있었다. 그러나 수진이가  와 있는 걸 알면서도 눈길 한번 웃음한번 주지 않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는 들어가버렸다.


"은주야. 우리 그 반에 오르간 가지러 가자."


음악실이 따로 없었던 학교는, 이반 저반 오르간을 나눠쓰며 음악수업을 진행했다.  ‘ 그 아이’ 반의 음악수업이 끝나고 직후 우리 반 차례라, 당번을 정해서 오르간을 옮기러 가야만했다. ‘그 아이’의 교실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에, 수진이는 다른 친구들의 당번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나서곤 했다. 터질것 같은 마음을 안고 교실 앞에서 한참을 쑥쓰러워 하며 망설이다가 문을 열면,  약속이라도 하듯이, 


"오~ 김민규!"


아이의 것도 어른의 것도 아닌, 낮고 갈라진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내가 오르간을 구하러 온 투사라도 된 양 담담하게 구는 동안, 수진은 그 순간이 싫진 않은듯 몸을 베베 꼬면서 그러나 눈을 날카롭게 하면서  ‘그 아이’를  찾는다. 하지만, 비슷한 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그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 아후! 이번엔 볼수 있었는데. 도대체 걔 자리가 어딘거야? 다음엔 꼭 보고 말거야."

아쉬운 마음 반, 앞으로도 있을 기회에 대한 결의에 찬 마음 반인채로 무거운 오르간을 씩씩거리며 옮겨왔다.  다른때와는 다르게 수진이의 열정은 갈수록 대단해져 갔고 , 나 역시 점점 사춘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몸이 더욱 성숙해지고, 생각은 많아졌으며 늘어가는 공부량에 불편해하면서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봄방학에 각각의 학교에 배정을 받은 후에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두려운 날이 계속되던 어느날이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친구가 왔어요."


내가 다니던 교회는 동네에서 작은 편에 속했지만, 동네 초입에 있던터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 아저씨를 닮은 전도사님 뒤로 누가 따라 붙어 있었다. ‘그 아이’ 였다. 반가운건지, 놀란건지, 불편한건지 아니면  그 모두 다였는지, 몇초 멍하게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인사도 없었던 그날부터 일주일에 한두번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수진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좋아하는 남자때문에 종교를 바꿀순 없다며 일요일 오후에 꼭 전화를 넣겠다고 했다. 그 다짐은 결코 가벼이 볼게 아니었다. 3년이 지나 수능을 앞둔 며칠전까지 이 약속은 꼬박 계속되었다. 오늘 뭐를 입고 왔는지, 키는 더 컸는지, 여자친구는 없는지, 대학은 어디를 생각하고 있는지 등의 질문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수진에게 이야기 해 줄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3년내내, ’그 아이’는 같은 고등학교 선배였던 나의 오빠와 둘도 없는 형, 동생이 되어 늘상 웃고 떠들었다. 가끔 둘은 예배도 참석하지 않고, 옆건물 오락실에서 하루종일 오락을 하기도 했다.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고 장난기도 꽤 있는 듯 하나, 나와 대화를 해 본적이 손에 꼽을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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