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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14. 2021

엄마의 총각김치와 포비네 짬뽕밥

2019년 11월 15일

어제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수원에서 미팅을 하고  동료들과 만나, 김포 현장으로 이동해서 건축주와 현장소장과 예상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정리하고, 김포시청에 들려 업무를 보고, 고양시 성사동에서 함께 집을 짓는 정현이네, 소율이네, 윤하네를 만나면서 하루가 다 지났습니다.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 수다 같은 회의를 하면서, 일주일 동안 웃을, 웃음을 늦은 시간까지 실컷 웃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소리를 듣고, 든든하게 옷을 준비는 했지만,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린 날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손과 발이 차지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는 저보고 많이 좀 먹고 다니라는 소리들을 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도 들어서 그런지 귀에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잔소리 같지만 저 역시 현장 식구들에게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술 좀 조금 마시고, 아프지 마라”라고 합니다. 일도 일이지만 정이 들어서, 염려의  소리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하는 소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성질 좀 그만 부리고 실속 좀 차립시다”입니다. 

현장 식구들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가오‘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 같습니다. 풀어 보자면 체면이나 허세, 명예 같은 뜻입니다. 현장 식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체면, 자부심, 장인정신’ 같은 것은 지키더라도, 지금 세상에서는 ‘실속’도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봄부터 준비한 일들이 겨울이 되어서야 공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 계절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몸도 움츠릴 뿐만 아니라 현장을 운영하는 경비와 인건비가 동반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공사의 품질을 지키기 위한 노력 또한 봄, 가을보다 더 많이 들어갑니다. 굳이 이런 말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막일 현장’의 겨울은 춥고 힘이 듭니다.

김포 현장도, 성사동 현장도 겨울 공사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저야 손과 입으로 이야기하면서 건축주와 현장 식구 사이에서 전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1:1로 집을 만들어 가는 식구들의 겨울나기는 걱정이 됩니다. 

추운 겨울날, 일 마치고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잔 하면서 술 한잔과 곁들여, 속말다운 맘속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시간입니다. 일하는 중에는 바쁘기도 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보니 반가운 사람들의 전화는 뒷 전이기 쉽습니다. “응 나야 왜? 지금 일하느라 오후에 통화할게” 오후 6~7시가 넘어  일을 마치고, 소주잔을 앞에 두면 방언이 터지듯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는 현장 식구들. 올 겨울에도 아프지 않고, 집에도 자주 가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세 가족의 집을 짓는 성사동 회의는 늘 스머프네 집에서 합니다. 스머프는 반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아빠고, 엄마인 포비는 얼마 전까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늘 저녁 시간에 회의를 하다 보니 스머프는 반찬을 가져오고 포비는 찌개와 밥을 준비합니다. 

새벽에 나와서 종일 돌아다니며, 제가 만든 발효빵 몇 조각을 아침에 차 안에서 먹고, 점심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청국장 순두부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침에 먹다 남은 청국장에 물과 순두부를 넣고 다시 끓인 것 같은 그런 맛입니다.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맛. 추운 날 따뜻하게 먹었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제 입맛에는 맞지 않았나 봅니다. 어제 제가 만든 소금 빠진 발효빵 같은 그런 맛이라고 하면 더 어울리겠네요. 아침과 점심을 그렇게 먹어서 그런지 저녁에는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 같은 것을 먹고 싶었습니다. 

“성사동에 가면 맛있는 뭔가 있을 것 같아”라는 의식 밑바닥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 스머프와 포비네 집에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윤성이와 소율이가 책을 보고 있고, 포비는 해물 짬뽕을 준비하면서 나머지 가족들 오면 그때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다, 제 젓가락이 먼저 간 반찬이 있습니다. 포비네 어머니가 보내 주신 총각김치입니다. 어렸을 때 맛보던 빨간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소금간이 맞는 총각김치를 두 접시나 먹고, 집에 돌아올 때는 “다 먹고 이거 남았는데 너무 맛있게 드셔서 드리려고 해요. 작지만 가져가셔서 가족들과 같이 드세요.” 스머프가 싸준 다른 반찬과 어머니의 총각김치를 종이가방에 넣어 왔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포비의 짬뽕국물 소개가 덜 되었네요. 양파가 충분히 들어가서 달달하면서도, 해물로 국물을 낸 얼큰한 해물 짬뽕 덕분에 밥을 한 그릇 다 비웠습니다. 소금 빠진 발효빵과 청국장 순두부의 부족함이 꽉 채워진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저녁 시간 내내 든든한 웃음으로 집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었습니다. 건축주들과 현장을 운영할 진수 소장의 투덜거리는 모습도 이쁜 어제저녁이었습니다. 
입동(立冬)이 지나고 다음 주면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입니다. 

“이 소장 찢어진 청바지 춥겠다. 따뜻하게 입어요” 
“아직 안 추워요. 오래 입었더니 청바지가 찢어지네요”
간지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김포 현장의 이 소장은 손맛이 좋은 장인입니다. 솜씨가 좋아서 부르는 별명이 ‘망치’입니다. 잘못 들으면 무서운 별칭인데 마음이 따뜻한 소장입니다. 
김포 현장에서 살고 있는 안양까지 집이 가까워서 매일 출퇴근을 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스머프와 포비가 싸준 전갱이, 고추무침, 절인깻잎, 총각김치 덕분에 오늘 아침밥이 어제저녁처럼 든든합니다. 소금 빠진 발효빵도, 청국장 순두부도, 찢어진 청바지도 제 생활의 일부이니 뭐하나 투덜거릴 필요는 없겠지요. 오늘 하늘은 비 오는 구름이 가득한 게, 덕분에 모두 쉬어가는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설계자가 일을 여는 사람이라면 시공자는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입니다. 건축주는 설계자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시공자와 소통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_ 건축가의 정원, 정원사의 건축 중에서>


엄마가 보내준 김치에서 나는 엄마 냄새
포비네 짬뽕밥을 먹으며 건축주의 마음씀에 엄마들의 마음을 느끼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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