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by 빵굽는 건축가

늦은 시간이지만 약수물을 뜨러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약수터는 옻나무에서 나오는 물이라 하여 ‘옻샘’이라고 불리면서 많은 분들이 물통을 들고 찾아옵니다.


북향의 음지에 경사가 진곳이라 해가 들지 않고 가파릅니다. 남쪽 산으로 난 숲길을 따라 걸으면 단풍도 좋아 제법 운치가 있는 중턱에 '옻샘'이 있습니다.

한 달에 몇 차례 산보 삼아 다녀옵니다. 약수터에 들고 다니는 물통은 물을 뜨러 오는 분들 사이에서는 가장 작은 통에 속합니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작은 물병을 몇 개 들고 다녔습니다. 모두들 10리터 이상되는 통을 들고 다니는데 너무 빈약해 보였는지 "물병을 구입해서 들고 오면 어떠냐"는 제안과 조금 안되어 보인다는 뉘앙스를 품은 표정들도 보여주었습니다.


평소에도 인사를 잘하는 편이라 약수터에서 처음 보는 분들에게도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하고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도 장소성과 분위기라는 특징이 있는지, 약수터에서는 보너스가 있습니다. 저의 작은 물통을 보는 순간 물을 먼저 받으라고 양보를 해줍니다. “물 받으려면 한 참 걸리니까 먼저 받아요. 물병이 없나 봐요. 요즘 가격도 얼마 안 하는데 하나 사서 들고 오지...”

“네 하나 준비해야죠. 그럼 제가 먼저 물을 받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인사의 미덕은 기본이고 잘하면 좋은 일도 생기고 이웃도 만들게 됩니다. 물을 받는 동안 어디에 사는지 물은 언제 받으러 오는지 짧지만 간단한 정보도 나눌 수 있지요.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 우물가와 빨래터의 풍경이 그랬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물을 긷고, 빨래를 하는 그 사이에 인사를 나누고 자주 만나게 되니 집안의 대소사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안부를 알 수 있는 수다스러운 장소였던 것이죠. 지금이야 집마다 물이 나오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건조기가 빨래를 말리니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무대는 사라진 셈입니다. 편리하기는 한데, 이웃은 점점 멀어지는 생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웃 간의 친목도 사라져 가고, 가족 간의 화목도 멀어지니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공간을 디자인하고 구체적인 장소를 만드는 건축가로서 저의 역할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5리터짜리 새 물통을 구입했습니다. 작은 배낭 안에 쏙 들어갈 수 있어 편리한 크기입니다. 물통을 바꾼 이후로 인사를 깔끔하게 해도 물을 먼저 받으라고 양보하는 분들이 줄어들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가끔 볼품없는 예전 물병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약수통.jpg 5리터 물통은 우리가족의 필수품이 되어습니다. 먼길 여행지에서도 물통은 잘 쓰입니다.


어제 약수터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늦은 시간에 약수를 뜨러 오는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십니다. 무섭냐는 소리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이니, 이 산에 멧돼지가 자주 내려온다고 들려주십니다. 얼마 전에는 약수터까지 내려와서 땅을 헤집고 다녔다고 구체적인 위치까지 알려주시더군요.

아주머니도 30여 미터 떨어진 근처 개울에 멧돼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줄행랑을 친 이후로 오랜만에 왔는데 지금도 무섭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이 물 아니면 소화가 안된다고 물을 떠 오라고 하셔서 어찌하지 못하고 물을 다시 받으러 왔다고 하네요. 약수터의 돌 두꺼비에서 나오는 물이 통을 채우는 동안 멧돼지가 내는 소리도 흉내 내서 들려주고, 도망을 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공포스러웠던 당시의 분위기도 표정으로 보여주시는데, 이쯤 되니 저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실은 저도 지난여름에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약수터에서 물을 받고 있는데 남동쪽으로 40여 미터 떨어진 산 등성이에 멧돼지 가족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저와 거리도 있고 설마 하니 멧돼지가 나한테 올까 하는 생각도 들고, 멧돼지 가족 중에 두 마리의 새끼 돼지도 있어서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멧돼지가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함께 보았는데 위험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발걸음을 빨리 했던 게 지난여름 일이기는 합니다.


멧돼지의 습성을 찾아보니 어류와 곤충까지 먹는 잡식동물로 먹이를 찾아 농작물을 파헤치고, 도시까지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둥이와 송곳니로 땅을 파헤치고 번식기와 포유기인 11월부터 6월까지는 흥분을 잘하고, 귀도 밝고 냄새도 잘 맡는 반면 눈이 나쁘다고 합니다. 멧돼지를 만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등을 보이며 도망가지 말고, 바위나 나무 뒤에 숨고 자극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니 관심 없는 척하면서 자리를 피하라고 하네요. 가장 중요한 것은 즉시 112로 신고를 하라고 합니다. 신고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가을 이후로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번지면서 멧돼지 사냥이 허용되고 난 후 인근에서 사냥총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총소리가 나면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밖에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는 합니다.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자연농교실>에서 "옛날 농부는 모든 걸 손으로 했기 때문에 논밭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사냥꾼이 줄어들며 마을과 산의 경계지역에서 산짐승을 쫓아 돌려보내지 못하게 된 것도 피해가 늘어난 이유다. 야생동물은 어떤 사람이 자기를 무서워하는지 안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갖고 논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동물에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라며 동물과 인간의 경계지에서 서로의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쓰고 있습니다. 저는 멧돼지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요?


물통에 물을 채운 아주머니는 “기다릴 테니, 같이 내려가요”라며 든든한 목소리로 염려를 해주십니다. 아주머니 말씀에 나 혼자 물을 받고 있을 때 혹시나 했던 걱정이 작아지더군요. 약수물로 차와 커피를 내리면 맛이 좋아 여전히 물을 뜨러 다니는데, 그나저나 지난봄에 보았던 멧돼지 가족은 무사한지 염려가 됩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마주칠 일이 없을 텐데 야생동물들 처지에서 보면 자기들의 영역까지 사람들이 침범을 하는 것일 테고,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피해를 주는 몹쓸 것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야생동물과 공존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있다면 어떤 것일지 생각하게 되네요. 서로에게 몹쓸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9년 11월 30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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