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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Dec 06. 2024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빨갱이로 불리는 꿈을 꾸니까



“왜 그랬는가요? 참말로 한번 반동은 영원한 반동이라 그랬능가요?”

화르르, 성냥불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백원짜리 백조 한개비를 물었을 터였다.

“질 줄 알았응게.”

“예?”

그가 되물었다. 나도 묻고싶었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바깥은 한동안 잠잠했다. 아버지가 담배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가도 되려나 싶어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은혜를 갚을라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

벌교 보성여관에 붙어있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태백산맥 10권이 지나고도 살아남은 빨치산, 위장전향을 한 빨치산과 그 후손들이 겪었을 이야기다. 기이하게도 독서의 흐름을 잘 잡아가고 있다. 우연히 토지를 읽고, 어쩌다가 태백산맥을 읽었는데, 그 이후로 완독 한 것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태백산맥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 역시 받아들이는 깊이가 달랐을 것이다. 바로 하루 전까지 산속에서 짐승처럼 몰이를 당하고 떼죽음을 겪는 염상진과 부하들의 여정에 숨이 가빴는데, 어떻게 이 책에 안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아마 책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부모님은 하대치와 외서댁이라기보다는 안창민과 이지숙의 삶이었을 것이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고, 인민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해버리는. 여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따라오며 내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몸담았던 ‘좌익’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의와 그에 따른 다수 인구의 안정이고, 반민족세력과 미국이 주도하는 ‘우익’은 절대적으로 돈과 권력이 중심이다. 머리가 아찔해진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목이 찢어져라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명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엄한 목숨을 버리고 패배까지 하고 온 이 나라에서는 곧 죽어도 자본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다수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모두 다 자본주위를 위협하는 공산세력의 선동인 것이다. 이제야 터무니없는 헛소리들의 결이 맞추어진다. 가진 돈을 잃게 하는 것들, 쥔 재산을 떼어가는 것들, 권력을 위태하는 것들은 우익의 적이다. 이승만 이래로 우익의 적은 좌익이었고, 남한의 적은 북한이었고, 그전에 농민의 적은 지주였으며, 백성의 적은 부패관료였다. 인간을, 인간을 믿을 수만 있다면.

신의가 가득 찬 인간들이 이 땅에 가득했다면 무슨무슨 주의에 기대지 않아도 다수가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굴러갔을 것이다. 서로 의견을 나누며, 불만과 소란을 잠재우며 그렇게 도란도란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땀 흘리는 농민들의 요구를 짓밟기 위해 외세에 손을 벌린 나라다. 제 백성을 때려잡기 위해 왜구가 온 땅을 불태우도록 내버려 둔 나라다. 종국에는 그렇게 통째로 일본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굴러 나오니 그대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똥구멍 속으로 대거리를 들이민 나라다. 내가 사는 나라는, 그런 나라다.

인간을, 인간을 믿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꿈에서도 겨울 산을 헤맨다. 손가락발가락이 시퍼렇게 얼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는 꿈을 꾼다. 시체가 된 동료를 어깨에 이고 비탈을 오르다 같이 시체가 되는 꿈이다. 목과 허리에 총을 맞는 꿈이다. 나는 인간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감정을 의탁해 패할 것이 뻔한 싸움의 결과를 따라가느라 힘이 든다. 역사 투쟁이라고, 우리는 모두가 한 번씩 죽고,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지, 그런데 인간을 믿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이름 석자 옷 한 벌 후세에 남길 수 없어도 악에 받쳐 버텨냈던 그들의 투쟁이, 비참하고 더러워도 꾸역꾸역 지켜냈던 그들의 신의가 역사가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고결하게 지켜낸 것이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된 세상에서 나는 또 겨울산을 헤매는 꿈을 꾼다. 허벅지에 옆구리에 총을 맞고 깬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지금은 <이현상 평전>을 읽는 중이다. 이현상이 누군지도 모르다가, 박헌영 이주하 김삼룡이 누군지도 모르다가(영화 실미도에서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는 하다) 그들의 살아생전 발자취를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밟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자들이 없다. 그중에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약해지지도 않고 처절하게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막연하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광복을 믿지 않고서는 해나갈 수 없던 일들을 온몸으로 치러온 사람들. 그들 중 대부분은 좌파였고, 남한을 고향으로 둔 이도 여럿이었으며, 육이오 전후로 월북하거나 미군정 당시 고문취조로 빨갱이의 오명을 쓴 채 남한의 역사책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그저 대한의 독립을 바랐을 사람들은.


이현상 선생의 온 인생이 한국의 피비린내 나는 시대를 머금고 있다. 일제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광복 직후의 혼란과 연이은 중도파 독립운동가의 암살, 남한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의 핍박, 제주도와 여수, 순천에서 발생한 남로당원의 섣부른 반란. 여기까지만 읽었는데도 속이 터진다. 사람을 믿었던 이현상은 사고를 쳐도 크게 친 반란군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간다. 내가 지금 넘겨야 할 페이지의 부제도 ‘아, 지리산!’이다. 아, 지리산.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기어올라갔던 지리산.


아마 오늘도 나는 굽은 등에 총을 둘러맨 꿈을 꿀 것이다. 두 눈이 뽑히고 손이 뒤로 묶인 친일경찰 서장을 차에 끌고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남로당 반란군의 행태에 경악하면서, 그 후에 마을 하나를 없애버릴 듯이 죽여대는 국군들의 학살에서 도망치면서.


질 게 뻔한 투쟁이었다.

사상과 신념만 믿고 올라온 빨치산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비록 질 게 뻔할지라도, 같은 것을 믿었던 동료들과 함께 맞는 죽음이라면 그것은 역사투쟁이라는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죽고, 산화하고, 잊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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