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들은 행복하고 좋은 꿈들만 가득하기로.
내란범이 석방됐다.
글을 쓰기도 싫고.
일상을 영위하기도 싫고.
힘이 쭈욱 빠진다.
하루종일 밀린 집 정리를 하고 빨래를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틀 전 악몽을 꾸고 아직도 뒷덜미가 쭈뼛쭈뼛하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뭔가 더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동지들과 민주노총 금속노조원들이 첩첩산중의 요새에 숨어드는 꿈을 꿨다. 거대하고 육중한 산맥 사이에 정부의 사냥을 피해 들어간 정의로운 사람들이, 조금 피곤하지만 안전한 상태로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는 꿈을.
꿈자리가 사납다. 눈을 뜨고도 서늘하고 뒤숭숭한 것이 잔상이 오래 남는 그런 꿈이다.
한참 내란범이 북한을 도발하던 2023년 여름에 불현듯 위기감이 들어 재난가방을 쌌었다. 자가발전 손전등 라디오, 은박담요, 성냥, 초, 장갑, 맥가이버 칼, 우비, 랜턴, 노끈, 비상식량, 텐트, 침낭, 핫팩, 여분 옷, 정수 필터, 간이 물통, 태양열 충전기. 이렇게 챙겨둔 가방은 고스란히 집회 물품이 되어서 한강진과 옵티컬 철야 농성에 쓰였다. 선견지명이라 해야 할지, 어쭙잖은 예언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먼지 쌓이기 직전의 물품들을 뒤적거리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것들을 다 쓰긴 쓰네. 그것도 아주 알뜰살뜰 거를 것 없이 쓰네.
이틀 내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아서 어제 새벽 술을 잔뜩 처먹은 채로 다시 전쟁가방을 쌌다. 딱 2023년 여름처럼 차에 실어놓을 가방 하나와 집에서 들고나갈 가방 하나를 챙기고 보니 또 헛웃음이 나온다. 모든 촉이 빗나갔으면 좋겠다. 더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하루종일 같은 얘기만 나오는 뉴스를 틀어놓고 의욕 없이 시간을 보냈다. 글도 쓰기 싫고, 일상을 보내기도 싫다. 집회도 시위도 다 싫다. 저 가방을 쓸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진다. 차 트렁크에 가방을 싣으러 나가니 날이 많이 풀려있었다. 봄냄새가 난다. 누구는 피난짐을 꾸리고 있는데.
나는 어제도 오늘도 집회에 가지 않았다. 내란이 터지고 토요일에 집회에 나가지 않은 건 처음이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동지들의 상경투쟁 중 광화문에서 만나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달력을 들고 셈을 해보았다. 12월 6일부터 오늘까지 내가 붙어있던 곳들을. 총 쉰네 번의 집회와 농성에 따라다녔다. 그중 토요일 집회는 열세 번이다. 내란부터 지나온 열네 번의 토요일 중 내란범의 구속과 파면을 외쳤던 토요일이 열세 번. 얼마나 더 기도해야 옆자리의 사람도 나도 더 편안하고 따뜻한 곳에서 토요일을 보낼 수 있을까. 봄이 왔는데. 이제 햇살이 따사로운데.
뉴스 앞에 앉아서 멍하니 내란범의 거동을 쳐다보고 있다가 핸드폰이 울렸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합원 동지가 보낸 문자다.
‘걱정 마시고 푹 주무시소 동지’
우리 동지가 나한테 텔레파시를 썼나, 남들은 모르던 예지 능력이 있나. 이렇게 다정하고 가래떡처럼 폭닥폭닥 말랑한 사람들이 어떻게 투쟁을 한다는 거야.
나의 열두 명의 영웅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만인이 망설일 거친 길을 가면서 사람 좋은 웃음의 모양 그대로 얼굴에 주름이 박혀있는 나의 전사들.
아무래도 내일은 광화문에 가야겠다. 어디서는 꿈이 또 반대라던데, 우리가 산에 들어가기는커녕 청와대나 국회에서 의사봉을 들게 될지 누가 알아? 그렇게 되면 깔깔 웃으면서 놀려줘야지. 동지, 정장이랑 의원배지 너무 안 어울려요! 정장 위에 노조조끼랑 단결투쟁띠가 다 뭐야아.
1월 4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광화문 집회에서 쩌렁쩌렁 외쳤던 발언이 생각난다.
”페미니스트가 대통령이 되고, 성소수자가 총리가 되고, 알바노동자가 노동부장관이 되고, 사고 피해 유족이 안전부장관이 되고, 전장연이 복지부장관이 되고, 전농이 농업부장관이 되고,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워왔던 이들이 평화부장관이 되는 이게 민주주의고 이게 진짜 정치 아닙니까? “
맞아. 역시 대통령에는 당신이 어울려.
악몽은 내가 꿀게요. 동지들은 잘 자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양정진 동지! 동지 덕분에 글 한편 씁니다! 노동부장관 되기만 해요. 실컷 놀려주러 갈 테니까. 그러니까 힘내서 나라 갈아엎어봅시다.
투쟁!
아, 나는 맥주 한 캔만 마시고 잘게.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한번 더,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