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C시에 위치하고 있는 S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수술해도 예전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얼굴에 큰 상처가 없다는 것이지요. 아- 제가 얼마나 얼마큼 다치셨는지는 잘 모르시겠네요. 저는 오른쪽 목과, 팔, 몸 부위, 다리에 화상을 입어서 그것에 대해 치료 중입니다.
처음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이대로 살 수 있을까, 제가 봐도 징그러운 상처들인데 과연 사회에 나가서 잘 적응하고 잘 살 수 있을까, 아직 학교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학교를 쉬다가 나가면 유급생이 될텐데, 그러면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을까 모두들 나를 피하지는 않을까하고 걱정하며 죽음을 결심한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은 주위에 걱정해주는 사람들과 그 날 화재사고로 인해 하늘로 가신 부모님, 그리고 지금 치료비와 생계비에 도움을 주시는 회장님의 걱정과 격려로 살아갈 힘을 조금씩 얻어, 약도 열심히 먹고 아프고 괴롭긴 하지만 치료도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회장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집이 좋은 형편은 아니었잖아요. 만만치 않은 치료비와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앞으로 먹고살아야 할 생계비도 걱정이었는데 선뜻 그렇게 큰 도움을 주시고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께서는 회사의 사회환원의 개념으로 기부하고 어려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회장님의 마음이 넉넉해지는 일이라 하셨지만 역시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송구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모님은 정의로운 분이셨어요. 집은 가난했지만 정도 많으시고 주변사람들을 많이 챙겨주셨어요. 저도 그런 면에서 부모님을 매우 존경하고요. 또 그런 가르침을 많이 받았었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없다.’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항상 말씀하셨거든요.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우리오빠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어요. 정말 우리오빠라서 편드는 얘기가 아니구요. 우리 오빤 정말정말 착해요. 속도 깊고, 효자인데다가 제게도 아주 잘해주는 자상한 오빠죠. 우리오빠는 저랑은 또 달라서 공부도 잘했어요.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이었거든요. 전교 5등 아래로 떨어진 적도 없어요.
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번 있었네요. 오빠가 고등학교에 처음 진학해서 본 중간고사 때였는데 그 때 뒤에서 J라는 친구가 계속 답안지를 바꿔달라고 부탁했을 때 거절하느라 시간이 좀 모자랐었나봐요. 그래서 아는 문제인데도 찍고 답안마킹을 하고 냈다고 하더라구요. 그 때 아마 전교등수가 11등인가, 그랬을거예요. 그래도 그것도 엄청 잘하는 편이니깐 난 오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 때 저는 중학교 3학년이어서 중간고사를 봤는데 저는 반에서 7등을 했었지요. 그것도 뒤에서. 그래도 오빠는 저를 무시하거나 많이 혼내지 않았어요. 항상 자상하게 타이르고는 했었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 가족은 가진 건 없지만 그렇게 행복했었습니다.
올해 오빠가 고3이 되어서는 좀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긴 했지만, 성적도 문제없었고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수시도 넣을 예정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그 J라는 친구가 그 때 답안지를 바꿔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빠를 줄곧 괴롭혀 왔었던 모양입니다. 그 J친구가 우리 오빠를 괴롭히는 걸 보고 친구들이 담임선생님한테도 얘기를 했던 모양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징계 없이 그냥 타이르고만 끝났다고 하더라구요. 오히려 그 J친구는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게 된 것이 우리 오빠가 선생님께 이른거라 여기고 괴롭힘은 더 심해져갔습니다. 오빠는 많이 힘들었을텐데도 그저 괜찮다고 웃어보이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해줬었어요.
그리고 4월 말쯤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날, 가족끼리 근처로 벚꽃놀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부모님도 아주 오랜만에 맞는 휴식이었고 저는 곧 다가올 중간고사에 대한 걱정이 좀 있긴 했지만, 평화로운 봄날 다시 한 번 단합하자는 아빠의 의견에 모두들 동의하고 가기로 한 것이지요. 부모님과 저는 집이어서 바로 출발을 하기로 했고 우리 오빠는 약속이 있어서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2시였는데 오빠는 오지 않았습니다. 핸드폰도 없었기에 우리 식구들은 오빠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기다리는 도중 배가 고파 싸왔던 김밥과 과일을 먹었습니다. 오빠 것을 조금 남겨두고서요. 그러고 벚꽃 풍경을 즐기며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사서 사진도 찍고 놀았던 중 해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빠는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저는 헤매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기다릴까 하다가 너무 늦어져서 집에 가있거나 오기가 곤란할 수도 있을 듯 싶어서 오빠 없는 벚꽃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갔더니 경찰들이 와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들을 하더군요. 오빠가 죽었다구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오늘 벚꽃놀이를 가기로 했고, 오빠는 온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우리 오빠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오빠가 죽었다니요. 병원에 가보니 우리 오빠는 싸늘하게 식어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흔적들이 가득한 채.
신고 받아서 가보니 우리 오빠가 그렇게 되어있다고만 말하는 경찰이 무책임하게 느껴졌지만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후일에 오빠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 J친구와 우리 오빠가 그 날 만나기로 했었다고 했습니다. J친구는 자신들의 무리를 데리고 가 우리 오빠를 죽을 때까지 때리고 막상 죽고나자, 우리 오빠를 버리고 도망을 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건 제 추측이 아니고 나중에 경찰조사를 끝내고 들은 얘기지요.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 사람들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오빠의 친구들이 와서 연방 돕지 못해서 미안하다고만 얘기하고 울고 갔었지요. 우리 가족들은 피해보상이니 그 따위 것들은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와서 진심이 담긴 사과와 죽은 우리 오빠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직접 대면하면 나는 그들을 죽이고 싶었겠지만요. 그들은 끝끝내 잘못을 시인하지도 우리 오빠를 보내던 그 날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사죄의 말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큰 기업가라서 가진 재력과 권력을 오용하면서 그저 일을 쉬쉬 덮으려 했습니다. 오빠 친구들 몇 명과 부모님과 나는 경찰에 고소를 하고 이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 일이 어느 한 기자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리는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작은 종합일간지를 취급하는 회사였지만 우리의 억울함에 귀 기울여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지요.
인터넷에 그 기사가 올라왔고 몇몇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포털사이트에도, 검색어에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기자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사무실로 찾아가보았지만 그 기자님은 아무런 설명을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죄인처럼 미안한 얼굴을 하며, 돌아가라고만 했었지요. 저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얘기할까. 라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