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료품과 생필품 외에는 마트에 가도 특별히 살만한 게 없고 촌스럽고 유행이 지난 듯한 옷이며 신발, 가방 등은 내 쇼핑 욕구를 불러 일으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한 번 바르면 일주일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붉디붉은 립스틱에 유통기한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화장품은 눈길 조차 가지 않는다.
나이로비는 일 년 내내 한국의 봄, 가을 날씨(평균기온 17~25도)라 가벼운 여름옷에 카디건, 재킷. 스카프 정도면 1년을 버틴다. 4년 동안 이곳에서 내가 입었던 옷은 고작 10벌 정도.
10년은 족히 된 내 옷을 매일 돌려 입어도 이곳에선 촌스럽지가 않다.
속옷이나 겉옷, 신발은 낡아 헤어지면 새로 사는데, 그것도 1년에 한 번쯤 한국 나들이때 한꺼번에 사 가지고 오니 이곳에서는 새로운 물건을 사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특히 딸아이의 옷은 90%가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옷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3살이 된 지금까지 물려 입은 옷으로 잘 버티고 있고 작아서 못 입게 된 옷은 현지 고아원에 모두 가져다준다.
한국 옷은 정말이지 품질이 좋아서 물려 입은 옷을 물려주는데도 아직 새 옷 같아 물려주면서도 기분이 좋다.
한 번은 아이 팬티가 없어 급히 이곳 옷 가게에서 아이 팬티를 하나 샀는데, 딱 2번 빨았더니 양쪽 다리의 고무밴드가 나가서 팬티가 반바지처럼 너덜너덜 해져 버렸다.
앞으로는 한국에서 아이 팬티도 꼭 챙겨야겠다.
가구나 가전제품은 더하다.
말도 안 되게 촌스러운 디자인에 낮은 품질의 가구나 가전제품도 이 곳에서 사려고 하면 가격이 한국의 2~3배는 족히 된다.
모두 수입이어서 그렇다.
아무리 필요한 가구나 가전제품이라도 '한국에서 이 돈이면 얼마나 좋은 걸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웬만해서는 지갑이 열리지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 침대, 소파, 식탁, 책장, 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은 모두 이곳에서 중고로 구입한 것이다.
한국, 일본,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나이로비로 파견 나온 직원들은 파견 기간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대부분의 가구나 가전제품, 작은 소품까지 모두 벼룩시장에서 팔고 간다.
대부분은 본국에서 구입한 가격의 70%~80%의 값을 받고 팔 수 있으니 굳이 몇 년 쓴 물건을 되가져갈 필요가 없다.
몇 년 쓴 중고 물품의 품질이나 가격이 현지에서 새 물건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나이로비에서 아이 옷 물려 입기, 아이 장난감이나 책 물려주기, 가구나 가전제품 중고 거래 등은 이곳에서는 하나의 현명한 삶의 방식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뭐든 사지 않는다.
아이와 놀 곳은 더욱더 한정되어 있다.
한국처럼 놀이공원, 동물원, 키즈카페, 공연, 장난감 쇼핑몰, 문화센터 등 선택지가 너무나 많아 고민인 한국 부모와 달리 이곳에서 내가 아이를 데려가는 곳이라고는 슈퍼마켓, 집 앞 공원, 집 앞 대학교 교정, 아파트 안 놀이터, 가게가 전부이다.
그나마 1년 전에 큰 쇼핑몰에 키즈카페가 생겨 한 달에 한 번쯤은 키즈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한다.
나는 환경 보호에 대한 어떤 심오한 철학이 있는 사람도, 무소유, 무소비의 철학을 가진 사람도 아닌데 이곳 나이로비에서는 비자발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며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삶이 한가하거나 여유가 많았던 건 아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커넥트 커피에서 업무를 보고, 딸아이 유치원 등하교를 시키고, 하루 세끼 밥해먹는 일로 나름 하루 하루가 정신없고 바빴다.
머릿속엔 항상 다음에 해야 할 일거리들의 리스트가 쌓여 있었고 시간을 아껴 운동을 하고 책을 봐야 했다.
바쁘긴 했으나 단조로웠던 내 케냐 생활이 코로나 때문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단조로워졌다.
거기다 한가해지기 까지 했다.
한동안 내 머리는 자동적으로 시간을 채울 일거리들을 찾아내고자 분주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습관 조차도 며칠이 지나니 작동을 멈춰버렸다.
요즘 케냐는 우기라 매일 한번 이상씩 비가 온다.
이 말은 시도 때도 없이 전신주가 넘어지거나 발전기가 고장이 난다는 이야기고 정전이 된다는 이야기다.
가뜩이나 할 일도 없는데, 집에 전기가 없고 인터넷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머릿속이 까매진다.
저녁 6시가 넘어 해가 지고 난 이후에 전기가 나가버린다면 정말이지 할거라곤 잠을 자는 것 밖에 없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나와 우리 가족은 코로나로부터 살아남기, 살아내기를 이렇게 해나가고 있다.
먹고, 자고, 씻고, 놀고, 치우고 극도의 단순함 좋게 말하면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며.
코로나에 의한 비자발적 미니멀리즘 6주차
아침에 일어나도 아무 할일 이 없는 이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창밖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나뭇잎을 한참 쳐다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대학교 교정에 산책을 나가 비온 뒤 눈에 띄게 자라 있는 잔디들과 새 잎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도 한다.
2000년대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설겆이를 하고, 아이 밥을 먹이고, 매일 아이와 퍼즐 놀이를 하고 도미노 놀이를 한다. 어제는 폴리, 오늘은 타요가 되어 나쁜 악당들을 물리치고 또 물리친다. 가끔은 옛날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옛날 예능을 보며 아무생각 없이 웃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기가 나가도 이젠 놀라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촛불을 찾아 불을 켜고 지아와 나쁜 악당들을 계속 물리친다.
언젠가는 이 생활도 끝이 날텐데, 이렇게 편안하게 익숙해져 버리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야 할 날이 오면 어쩌면 지금의 이 단순함을, 한가함을 많이 그리워하게 되지는 않을지.
한편으론 생각해본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복잡해야 할 이유가 있는거였나?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가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이런 단순한 삶 속에서 더 또렷이 느껴지는것인데 말이다.
한국을 떠나 케냐에서 살며 단순해졌던 내 삶이 코로나로 인해 한꺼풀 더 벗겨지며 가벼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