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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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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Feb 17. 2024

DEEP SWIM

단편소설

버스에 올라타 운전석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사람들이 꽉 채워지자 버스가 덜컹거리며 문이 닫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너머를 응시했다. 창문 틈 사이로 옅은 바람이 흘러들어와 귓가를 스쳤다. 바다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데도 코끝에는 소금기가 감돌았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버스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10%밖에 남지 않았다는 알람이 깜박거렸다.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뒷좌석에서 여자들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왼쪽 창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파도가 흰 포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흐린 날씨라 아쉽다는 한 여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반대편 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오름이 보였다. 눈앞에서 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들춰본 잡지에는 제주도에 있는 오름은 368개라고 적혀있는데 누가 그걸 다 세봤을까.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나는 한 번도 오름을 세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큰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내린 여자 둘이 마지막으로 내리자 버스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풍경을 보는 것도 지겨워져 팔짱을 끼고 있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이상하게도 제주도에서 버스만 타면 졸린지 모르겠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파란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대정리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데 옆집보다 바다와 더 가까워 문 앞에서 열 걸음 정도만 걸어도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내 방은 바다 쪽을 향해있어 밤이 되면 파도와 바람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가끔 멀리서 대여섯 척의 오징어 배가 밝은 빛을 뿜어내는데, 창문으로 그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창문을 열어 반짝거리는 하얀 전구들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빗방울이 왼쪽 볼에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감귤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가 곧장 집으로 향했다.      


*

     

집 안으로 들어서니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마룻바닥에 짐을 툭 하고 내려놓으니 주방에서 엄마가 등을 돌렸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아들이 갑작스럽게 온 탓인지 놀란 기색이었다.

"아들,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집에서 좀 쉬려고 내려왔어. 아빠는?"

"요즘 작은 아빠네 횟집에서 일해. 밤 10시쯤 되면 올 거야."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엄마는 갈치조림과 된장찌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식탁에 앉아 어서 밥숟가락을 뜨길 기다리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일 년 만에 아들이 연락 한 통만 없이  왔으니 물어볼 것이 많은 듯 엄마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나는 흰쌀밥에 삼치 한 덩이를 올려놓고 한입에 먹었다. 부드러운 삼치가 입안에서 사라졌다. 서울에서 배달 음식이나 라면만 먹고 있으면 이런 맛이 있다는 것을 가끔 까먹는다. 밥을 두 숟갈을 뜨고 나서야 엄마는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훈련은?"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항상 똑같지."

엄마는 요즘 근처 모슬포항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모슬포 쪽에는 관광객이 자주 와 일감이 끊기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제 무표정한 얼굴을 해도 이마와 팔자 주름이 깊게 파인 엄마는 마른나무처럼 생기가 없어 보였다. TV 옆 오래된 철제 쿠키 상자에 수북이 쌓인 약봉지를 보니 예전보다 세 봉지 정도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뜸을 들이다 언제나 그랬듯 능청스럽게 학교 후배였던 김민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번에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는 것을 뉴스로 봤다는 것이다. 나는 묵묵히 쌀밥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 갈치 살을 크게 떼어내어 입에 집어넣었다. 가시를 그대로 씹어버렸는지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캑캑거리는 나에게 엄마는 물이 담긴 머그잔을 건넸다. 여러 번 목을 축이며 가시를 넘기려 애를 썼지만 잘 넘어가지 않았다.

"가시 조심 좀 하지."

나는 남은 밥을 크게 떠 입에 욱여넣었다. 아까만큼의 고통은 없어졌지만 무언가 걸려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빈 밥공기를 들고 일어섰다.

"조금 더 먹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싱크대에 식기를 내려놓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 주방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내가 여느 때처럼 휴가쯤으로 온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게 영원한 휴가일지도 모른다는 건 몰랐겠지만 말이다.

내 방은 여전했다. 푸른 체크무늬 이불이 깔린 침대. 침대 위에 콜드플레이의 포스터 오른쪽 모서리가 찢긴 채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고등학교 교과서 옆에 있는 색이 노랗게 변한 만화책 몇 권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옆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메달이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오려낸 일간지 신문 조각이 들어있는 액자에는 수영모를 뒤집어쓴 내가 메달을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10년 전부터 세월이 멈춘 듯했다. 마치 나이를 먹은 건 나밖에 없다는 듯 모든 게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침대에 벌렁 누웠다. 어쩐지 꼼짝도 하기 싫었다. 심지어 눈을 깜박거리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천장 모서리에는 갈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얼룩은 일렁이는 갈색 파도처럼 물결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모로 누워 목젖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작은 가시 조각이 목에서 걸려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신경 쓰였다. 


*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창문 밖으로 붉은빛이 들어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휘잉 거리는 바닷소리는 마치 누군가 울부짖는 것 같았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마침내 집에 왔다는 게 느껴졌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부*석 님 15000원 Apple'. 자동결제 문자였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남은 잔액을 확인했다. 남은 돈 칠만 오천 원. 더는 통장에 입금될 금액은 한동안 없을 것이다. 

이 주전쯤이었다. 훈련하다가 근육이 뒤틀리고 광배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고통이라 무시했는데 곧이어 겨드랑이 사이가 터질 것 같았고 나는 그대로 수영장 바닥에 처박혔다. 어쩐지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후 잠깐 기억이 없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수영장 바닥에서 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레일에서 사라진 것을 본 코치가 몇 번 소리를 지르다 결국 물속에 뛰어들어 건져냈다고 들었다.

그 이후로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매번 훈련량을 줄이라고 경고했던 의사에게 더 이상의 훈련을 계속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의 표정은 한껏 심각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헛웃음이 났다. 드디어 그만둘 이유가 생긴 것이다.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물속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허리디스크는 심했고 오른쪽 어깨 통증 때문에 갈수록 손을 뻗을 때마다 저렸다. 내버려 뒀던 왼쪽 무릎 연골도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다. 코치 역시 나의 몸 상태를 눈치챈듯했다. 이제 더는 젊지 않은 나이에 프로 선수로 데뷔하고 나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매번 새로운 선수들이 데뷔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 칸씩 뒤로 밀렸다. 내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보상해 줄 거라 믿었지만 실제로 나는 천천히 바다에 가라앉은 배처럼 침몰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주면 계약 해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수영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생각까지 이르게 되자 어쩌면 그때 수영장 안에서 죽어버리는 것도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도 찾지 못하게 바다에 빠져 죽으면 어떨까. 그동안 받았던 선수 멘탈 훈련이 무색하게도 나는 더 이상 서울에 홀로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늘어날 일도 없는 통장 잔고의 새로 고침 버튼을 몇 번 누르고 나자 휴대폰이 꺼졌다. 멍청한 눈빛을 한 내 얼굴이 액정에 비쳐 보였다. 나는 책상 아래에 둔 나이키 가방을 꺼내 지퍼를 열었다. 짐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지만 길쭉한 선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거실과 안방을 차례대로 돌아다녔다. 안방에 부모님의 충전기 두 개가 있었지만 단자의 모양이 달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모슬포항에 편의점 하나가 있었던 것 같다. 

시계는 오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맨발에 샌들을 신고 바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비는 한 두 방울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바다에 안개가 자욱했다. 눈을 감자 바닷바람 냄새가 났다. 소금이 안개가 되어 피부에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수영장 냄새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이런 진득한 바다 바람을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입술을 핥으면 진한 소금 맛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슬포항이 가까워지자 전에 보지 못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콜로세움처럼 둥그런 원형 테두리 아래 직사각형 통유리로 카페 내부가 훤히 보였다. 앞에 몇몇 작은 귤나무가 있었고, 마당에는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건물 오른쪽에는 돌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루프탑 위에는 철제 사각형 안에 베이지색 가림막이 눈에 띄었다. 젊은 여자 둘이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서울 카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사람들은 통유리로 건너편 바다를 보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여자와 눈이 맞았고 급히 고개를 돌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언덕 아래로 계속 내려가자 모슬포항이 보이기 시작했고 하늘색 간판이 달린 편의점을 발견했다. 유리 너머에서 하품하는 점원이 보였다. 나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으로 한 바퀴 빙 돌았다. 과자, 라면, 그리고 생필품 판매대. 세 바퀴를 돌았지만, 충전기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점원에게 다가가 물어봤더니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오른쪽으로 편의점 택배 옆 구석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는 곧 나에게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가리킨 곳은 보조배터리 유료 대여 코너였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앱을 설치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폰 측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몇 번을 눌렀지만, 다시 켜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생각해 보니 휴대폰 며칠 꺼둔다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서울 갈 때까지 연락해야 할 급한 일도 없는데,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연락 올 사람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천 오백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사고 편의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려 길을 걷고 있는데 모슬포 항구 가까이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검은 슈트를 입은 다이버무리였다. 여기서 원래 다이빙을 하는 곳이었던가. 어릴 적에 여기서 친구들이랑 놀았던 기억이 있었던 같기도 하다.

"부지석!"

멀리서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검은색 다이버 슈트를 입은 무리 중 한 남자가 나를 향해 팔을 양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서울에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젖은 곱슬머리가 달라붙어 미역 같았고, 길게 늘어진 눈꼬리 아래에 점이 보였다. 웃는 얼굴을 보니 잊고 있던 옛날 얼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양해원이다.

"너 진짜 오랜만이다. 부모님 뵈러 온 거야? "

그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그는 젖은 머리를 털며 나에게 물었다.

"한동안은 아마 있을 거야."

나는 호주머니에 있는 집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시간 되면 오늘 저녁이나 어때?"

나는 거절할 말을 찾으려다, 그의 구김 없는 표정을 보고는 그러자고 했다.


*

     

양해원이 옆집에 이사 온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에서 온 그의 가족들이 첫 수확이라며 귤을 건네주러 올 때 그를 처음 만났다. 귤을 한가득 들고 있는 아주머니 뒤에 서서  해원은 얼굴만 쏙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연한 갈색 곱슬머리에 볼록 튀어나온 넓은 이마. 햇빛을 받아본 적 없는 듯 하얀 얼굴이었다. 노란색 딱 맞는 티셔츠 아래로 통통한 뱃살이 살짝 보였었다.

얼굴이 익숙해질 즈음 해원은 자주 놀러 왔다.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이라 근처에 동갑내기는 그밖에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로 항상 안 계셨는데, 그는 대뜸 우리 집에 찾아와 밖에 있는 바다로 가자고 졸랐었다. 여름이 되면 해가 뜨자마자 바다에 뛰어 들어가 바다 빛이 와인색으로 물들 때까지 놀았다. 고운 모래 사이에 끼인 돌멩이들로 하얀 속살에 붉은 생채기를 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바다는 그저 우리의 놀이터였다. 해원과 나는 몇 가지 놀이를 만들었고 많이 웃었다. 지금도 환하게 웃고 있는 해원의 얼굴을 기억했다. 언제부턴가 해원의 하얀 피부는 어느새 나의 피부색으로 물들었고 그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해원은 나 외에는 다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몇몇 아이들은 돼지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싫어했었다. 같이 축구를 하던 친구 녀석이 나를 몰래 다른 곳으로 데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 쟤랑 놀지 마. 쟤 이상해"

나는 왜냐고 물었다.

"저 새끼 혼자 한 구석에서 킥킥 웃어. 기분 나빠. 자폐아 같아"

나는 화가 나 그 녀석을 밀쳤고 다른 아이들이 말리기 전까지 싸웠다. 반성문을 쓰고 나오는 교문 밖에서 해원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해원의 얼굴은 맞은 나보다 더 아파 보였다. 내가 바다에서 놀자고 해원에게 말을 꺼내자 해원은 평소와 같이 활짝 웃었지만, 그날 밤에 해원은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고 눈이 팅팅 불 때까지 울었다는 걸 아주머니에게 들었다.

그 이후 해원과 나는 수영 교실에 다녔다. 삼십 분 넘는 곳에 있는 수영 교실을 해원의 어머니는 매일 우리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셨다. 수영장 냄새는 고약했고 눈이 아팠지만, 더 수영을 잘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수영 교실을 다니게 된 지 6개월이 지나고 우리는 꿈나무 전국 수영대회에 나갔다. 레일 앞에 섰을 때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내 심장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전국 2위를 했었고, 해원이 6위를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수영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

해원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수영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집이 어려워졌고 해원은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바다 먼 곳을 보며 아무말 없는 해원의 얼굴을 봤을 때, 나 몰래 훌쩍 몇 년 나이를 먹은 어른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홀로 수영을 계속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양해원이라는 이름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기 바빴기 때문이다.


*


해원을 만나기로 한 곳은 모슬포항 부둣가 구석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횟집이었다. 입구 바로 옆 창문에는 TV 방영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50년 전통이라는 글자가 사람 얼굴 크기만 했다. 건물 중앙에 있는 유리문을 당겨 가게에 들어갔다. 오른쪽 맨 끝 테이블에 해원이 보였다. 해원은 소매가 팔뚝 아래까지 오는 크림색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이었다. 그는 나를 확인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동그란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는 그의 검은색 가죽 반지갑과 전자담배가 올려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고등학생 해원은 살집이 있는 통통한 모습이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제법 인기가 많을 그것으로 보였다.

노릇한 단호박 전이 먼저 나왔고, 갈치 회무침이 나왔다. 이윽고 스테인리스 접시가 중앙에 놓였다. 은색 껍질 아래  핑크빛 살점이 두껍게 썰린 고등어회가 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해원은 소주병을 들어내 컵에 한 잔을 따르고 나에게 소주병을 건넸다. 나는 병을 받아 그에게 따라준 다음 테이블 구석에 올려놨다. 그제야 나는 한 번도 그와 술을 마신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서울에 올라온 이후 제주 친구에게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제주도에 내려와서도 집에서 며칠을 묵고 다시 올라오기만 했다. 동창회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따로 연락 온 적도 없었다.

"여기서 초등학교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어."

그가 말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도 맞았거든."

나는 젓가락으로 얇게 썰린 고등어 회 한 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일은 안 힘들어?"

"아무래도 애들 에너지를 따라가는 게 힘이 들지. 다들 힘이 넘쳐서 말이야. 그래도 요즘에는 한 반에 열 명 정도라 예전보다 힘든 편은 아니래. 어린아이들 점점 줄고 있으니까."

해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해원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서울 올라가고 통 소식이 없어서 놀랐어. 휴대폰 번호도 바뀐 것 같고."

그는 나의 소주잔을 부딪치며 물었다.

"그냥 똑같지. 잠깐 쉬러 왔어."

"아직 수영하지? 서울에서 훈련하는 건 좀 어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어. 잘하는 애들은 매번 들어오고 뭐 그렇지."

갑자기 어제 먹었던 삼치 가시가 목에서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는 어때?"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나 곧 결혼한다."

그는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온 여자였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다가, 같은 초등학교에 부임한 지 이년 남짓 되었다고 했다. 적은 인원수에 젊은 교사는 그와 그녀뿐이었고 같이 밥을 자주 먹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고백했다. 그는 곧 상견례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한 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다 보니 조금은 걱정된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소주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네가 서울에 올라간다고 했을 때 놀랐어. 계속 함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는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수영하고 나서는 그것만 생각했으니까."

나는 잔을 끝까지 비웠다. 끝 맛이 썼다. 

"해원이 너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 원래 서울에서 왔잖아. "

나는 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에겐 여기는 내 모든 것이니까. 충분해 나에겐."

그는 묵묵히 한 잔을 바로 비워냈다. 곧이어 잠깐 담배를 태우려고 가겠다며 해원이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제주도에서 평생 살 거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아마 그가 수영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도 그는 뭍으로 올라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돌아와서 술을 다시 건넸다. 이미 테이블 위에 소주는 세 병이 쌓는데도 그의 얼굴빛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

     

해원이 자신의 집에서 한잔 더 하자고 했다. 나는 얼큰하게 취해 그러자고 했다.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셨는데도 평소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시면 마실 수록 더 마시고 싶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그의 방에 들어오니 그때야 속이 울렁거렸다. 울컥 구역질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모든 것들 게워냈다. 한참 변기와 마주하고 나서야 정신이 다시 돌아온 듯했다. 수도를 틀어 얼굴을 씻고 거울을 바라봤다. 목이 빨갰다. 화장실 문을 나오자 거실에 비친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오징어 배가 반짝이며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해원은 콜라를 따르고 얼음을 더 넣어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베란다에 다이버 슈트가 걸려있는 것을 보였다. 

"취미지 뭐. 바다 수영도 하고 다이빙도 하고 스노클링도 하고. 요새는 다이빙을 자주 해. 예전과 달리 주변에 가게도 제법 생겼거든. 사장님이랑도 친하고. 바다에 자주 들어가. 하영 씨한테도 내가 알려주고 그랬지. 하면 할수록 재미있더라. 가까운 공간에 살면서도 바다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이윽고 TV 옆에 있는 액자를 보며 웃었다. 해원의 옆에 통통하게 생긴 미인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너는 요즘에 해본 적 없어?"

그는 캔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나는 항상 수영장에만 있잖아. 바다에 안 들어간 지 얼마나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해원은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는 우리 한참 바다에서 놀다가 수영장에 다니고 바다를 가지 않았잖아. 근데 어른이 돼서 바다에 다시 가보니 그게 무척 신기해. 특히 모슬포항은 다른 데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고."

나는 살짝 약이 올랐다.

"바다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는 건 아니고?"

"너 시간 좀 되면 해봐. 분명 재미있을 거야."

해원은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나는 소주를 더 마셨고 내 입에서는 내가 생각하지도 않은 말들이 주절주절 나오고 있었다. 혜원도 기분이 좋았는지 우리는 서로 앞다투며 옛이야기를 쏟아냈다. 마치 10년간의 공백은 사르르 녹아들었고 어린 시절의 해원과 바다에서 함께 웃으면서 놀았던 때와 똑같은 감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해원이 큰 소리로 내일 수영을 하자고 했을 때 나는 그거 좋다고 되받아쳤다.

"오랜만에 같이 노는 거네. "

우리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를 이어가다 해원이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며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멈췄다. 방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해원의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분명 제주인데, 내가 기억하던 대정리 같지 않았다. 그의 방은 내가 서울에서 꾸미고 싶었던 방의 모습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텔레비전에, 부드러운 가죽 소파. 그리고 와인셀러까지. 십 년 전의 해원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이런 해원의 일상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나는 소파 가장자리를 응시했다. 콘센트에 검은색 충전기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몸을 움직여 충전기 선을 당겼다. 그리고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몇 초 뒤 휴대폰이 켜졌다. 배터리는 이 퍼센트였다.


*

 

햇빛 때문에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티 없이 맑은 느낌이 드는 푸른 벽지였다. 커튼을 걷고 있는 해원이 푹 잤냐며 물었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창밖을 보니 바다 위로 안개가 피어올라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제 담배 피우고 오니까 자고 있더라. 그것도 콘센트 옆에서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로."

해원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충전기를 깜박하고 서울에서 안 들고 와서 말이야."

나는 충전기에서 휴대폰을 뺐다. 해원은 나에게 귤을 던졌다. 그의 뒤 테이블 위에는 큼직한 나무 바구니 위에 주먹만 한 하귤들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손으로 두꺼운 껍질을 벗겨냈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코끝까지 닿았다. 나는 네 등분으로 나눈 뒤 통째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날이 안 좋긴 한데, 뭐 괜찮을 거야. 속은 어때? 바다 수영 할 수 있겠어?"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은 언제 준비했는지 라면 한 그릇과 보말 무침 한 접시를 내놓았다. 엄마가 어제 와서 해놓은 것이라고 먹어보라 했다. 나는 미역과 보말 한 개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

     

하늘은 여전히 회색구름으로 뒤덮여 햇빛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함께 놀던 바다에 도착하자 나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수영복이 없으니 바다나 구경하고 돌아가자고 하려 했더니 해원이 새것이라며 비닐 팩에 담긴 검은 수영 바지를 건넸다. 짙은 푸른빛 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레일이 깔린 수영장이 아니었는데도, 수영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마치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심장이 뛰고 어깨가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뒤에서 소리 내어 스트레칭하던 해원이 우두커니 서있지 말라고 몸을 움직이라고 말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이주 전의 고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해원이 다가와 내 표정을 살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더욱 세게 불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파도도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래는 못하겠네. 조금만 수영하다가 가자.”

해원이 먼저 바다에 뛰어들었다. 바다에서 한참을 수영하는 그의 등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파도를 가르며 쭉쭉 나아가는 해원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자세가 좋아졌다. 나는 바다 안에서 수영하는 해원을 멀뚱히 바라보며 모래 바닥에 앉았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해가 드러났다. 해는 이미 바다에 떨어질 듯이 해수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원은 한동안 수영하다 다시 육지로 걸어 들어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안 놀 거야?라고 묻는 해원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윗옷을 벗고 바다로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보라가 일었고 입에 짠 물이 살짝 들어왔다. 어릴 적 기억보다 더 썼다. 그리고 매번 해왔던 대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원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해원아.”

내가 다가오자 그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며 웃었다.

“어때 좋지?”

“그래.”

“옛날에는 이렇게 멀리까지 오지 못했잖아. 어렸으니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옛날처럼 게임 하나 할래?”

“좋지. 어떤 거?”

“바다 레이스.”

바다 레이스는 해원과 내가 지은 게임 이름으로 누가 더 깊은 바다까지 헤엄치는가 하는 경주였다. 항상 내가 해원을 이겼던 게임이기도 하다. 

“여기 조금만 가도 금방 깊어지는 곳이라 좀 위험하긴 한데.  조금 더 가면 다이빙 코스라서 말이야. 무리하진 않을 거지?”

“그래. 이번만 해보자.”

우리는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해원이 바싹 쫓아오고 있다는 것이. 바다 쪽으로 향할수록 파도는 잔잔했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느끼던 어깨나 허리 쪽 고통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 훈련이나 시합 때보다도 훨씬 좋은 컨디션이었다. 나는 속도를 더 내서 있는 힘껏 앞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그저 내 몸이 바다에 반응하듯 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태양이 머리에 닿을 것 같았다. 멀리서 해원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큰 내 호흡에 집중하며 손을 휘저었다.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손을 내저었고, 다리가 떨어질 것 같을 때까지 발장구를 쳤다.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지만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수도꼭지 물을 세게 틀어놓은 것처럼 나는 누가 가로막지 않으면 영원히 팔을 내저어 태양 끝까지 앞으로 헤엄쳐나갈 것 같았다. 점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바다를 가르고 또 갈랐다. 그러다가 점점 휘젓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몸이 이미 끝까지 바다에 잠겨있었다. 

나는 헤엄을 멈추었다. 대신 몸을 평평하게 일자로 만든 뒤 양팔과 다리를 뻗었다. 눈을 뜨자 희미하게 바바 아래쪽에 검은 구멍이 보였다. 블루홀이 여기 있었구나.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걸 알지만 어쩐지 아래로 내려가 검은 구멍에 닿고 싶어졌다. 남은 숨을 모두 밖으로 뱉는다면 어떻게 될까. 저 어둠에 빨려 들어간다면. 어쩌면 내가 원하는 대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수압이 점점 귀 고막을 누르더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눈앞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남은 숨을 모두 뱉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의 오른쪽 팔을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타이츠에 고글을 낀 남자였다. 그는 내 팔을 끌고 수직으로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온몸을 늘어뜨려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품들이 시야를 자꾸 가렸다. 무언가 머리에 부딪혔고, 곧이어 내 몸이 끌어올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보트 바닥에 누워 먹은 바닷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짠 바닷물이 입을 바싹바싹 마르게 했다. 중년의 사내가 물을 건넸다. 고개를 들자 검은 다이버 슈트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해원이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더니 고글 바닥에 던졌다. 

"너 지금 진짜 죽을뻔한 거 알아."

 나는 고개를 들어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바다는 말이야, 따뜻해 보이지만 잔인해. 그러니까 결코 마음을 풀어서는 안 돼."

이유는 모르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일그러진 해원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풀어졌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힘이 빠졌고  눈에서 무언가 흘러나왔다. 해원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방향을 돌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터져버린 것이다. 내 마음속 검은 구멍에 채워 놓은 그 무언가 때문에.


*

     

축축한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나와 해원은 말없이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오랜 침묵 끝에 해원이 말했다.

"예전에 네가 날 구해준 적 있었지."

나는 그를 쳐다봤다.

"너희 집 앞바다에서 한참을 놀았을 때 말이야. 멀리까지 가보려다 발을 헛디뎌서 깊은 곳에 빠졌잖아. 그때 정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어. 그때가 해 질 무렵 가까이여서 그랬는지, 무서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어. 허우적거리다가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지. 그때 네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바닷속에서 홀로 남았을 거야."

해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너에게 고마웠고, 너를 참 부러워했어."

해원은 먼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네가 수영을 배워보자며 날 이끌고 수영 교실 다닐 때도,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난 제주에 계속 있지 못했을 거야. 적어도 바다에 계속 뛰어들지 못했겠지. 그렇게 수영 교실을 다니면서  더는 물이 무섭지 않게 되었어. 또 수영 교실을 다닐 때, 마치 너는 빛나는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묘한 질투심도 났지만."

해원이 말했다.

"그러니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그냥 괜찮아."

그는 방수팩에서 충전기를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일부러 주러 가져왔어. 충전기 빼먹지 말고"

그의 방에서 본 충전기와 같은, 그리고 새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바다는 더 붉어지다가 어두워졌고 녹색 광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 안에서 물건 하나 꺼내놓지 않았던 나이키 가방을 다시 들었다. 물건 하나가 더 늘어난 가방이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텅 빈 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다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제주 공항은 여전히 북적거렸고 날씨는 화창했다. 야자수 나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웃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꽃무늬 티셔츠를 입은 커플들. 밀짚모자를 쓴 아이를 손으로 보듬고 한껏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아저씨. 공항 앞에서 셀카봉을 들며, 동영상을 찍는 것 같은 여자 둘. 나는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을 한번 바라봤다.

나는 예매한 티켓을 출력하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구십 팔 퍼센트 충전되어 있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해원이에게 다시 서울에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비행기는 정각에 출발했고 순식간에 하늘로 붕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다시 깼을 때는 어느새 서울에 도착해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았다. 한강을 달리는 버스에서 나는 창가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한강 위에 빼곡히 서있는 건물들은 마치 오징어 배의 불빛 수십 개가 늘어선 것 같았다. 나는 문득 한강의 깊이가 궁금해졌다. 제주의 그 푸른 구멍보다 깊을까. 그 구멍의 깊이를 떠올려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다음에는 충전 잘 해오라는 해원의 답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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