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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19. 2024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

짧은 리뷰

전쟁 피해는 제대로 기록되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고민이 필요하다. 전쟁과 학살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많은 이들-활동가들과 언론이 선택하는 방법은 참혹한 전쟁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신체가 훼손되거나 파괴된 도시의 이미지라든지, 혹은 전쟁범죄자들의 잔혹한 행동을 묘사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문학이나 영화 같은 매체들에서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토론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사회운동에선  당장의 학살을, 전쟁과 파괴를 막기 위한 일이라서 그런 토론이 드물다. 확실히 피해자를 불쌍하게, 더욱더 불쌍하게 보이는 홍보는 파급력이 세다. 사람들의 눈길을 이끌기 쉽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마뜩잖다.


'불쌍한 피해자'는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한다. 동정심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불쌍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은 굉장히 중요한 감각이고 꼭 필요한 감각이다. 하지만 동정심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동정심은 피해자를 동정의 대상에 가두어 그들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대상화된 피해자를 바라보는 나(우리) 또한 폭력의 구조 속에 위치한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에 떠밀려온 세 살짜리 아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난민 정책을 바꿀 정도로 큰 힘이 있었고, 그런 변화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면서도 아일란 쿠르디가 난민이 되어야만 했던 진짜 이유-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게 꼭 자극적인 이미지 탓은 아니겠지만, 자극적인 이미지가 문제의 원인을 지목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 문제의 원인은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고통을 수반하는데, 자극적인 이미지는 원인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에 잠기면서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감각에 안전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극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관심도는 뚝 떨어진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 잘 모르는 나라, 잘 모르는 민족이 겪은 일을 전달할 때 더욱 그렇다. 똑같은 비극이라도 뉴욕 한복판 고층 빌딩에서 비행기 테러로 수천 명이 죽는 일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전쟁범죄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일에 사람들이 갖는 관심의 정도와 느끼는 감정의 온도는 무척 다르다. 그러다 보니 시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만 하는 활동가들이 자극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에 유혹을 느끼기 쉽다. 고상한 척하는 것보다 당장의 효과가 중요하니까.



문제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고민하는 책 


그런 면에서 보자면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는 전쟁과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지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돋보이는 책이다. 로힝야 난민 캠프 내 여성들의 자활프로젝트를 다룬 이 책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가해자의 잔인함을 전시하는 대신 학살 이후 난민캠프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반짝이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암담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박하고 착한 얼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로힝야 난민 여성들이 처한 이중 삼중의 억압구조-인종차별과 가부장제와 절대빈곤을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솔비, 오로민경 두 예술가가 미얀마와 국경이 인접한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지역의 로힝야 난민 캠프 내 일종의 여성 자활 공간 샨티카나에서 진행한 예술 워크숍 경험을 중심으로 샨티카나의 탄생 과정과 함께 로힝야의 역사와 학살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책의 구성이 독특한데, 보통의 경우 이런 책들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배경이나 난민의 원인이 된 사건을 먼저 보여준 뒤 난민캠프의 현황을, 마지막으로 저자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서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본 정보도 가르쳐주지 않고 가장 먼저 난민캠프에서 예술 워크숍을 했던 전솔비 작가의 일기를 보여준다. 북토크에 한 번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전솔비 작가는 이러한 구성의 의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전쟁, 학살을 겪은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이 이들을 불쌍하게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반짝이는 일상에 독자들을 초대하고 싶었다는 말로 기억한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분노의 감정보다는 (두 작가를 향한 로힝야 여성들이 빚어내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에 위치한 글-이유경 기자가 쓴 로힝야의 역사와 수차례에 걸친 로힝야에 대한 미얀마의 학살에 대한 글을 읽어 나갔기 때문에, 책을 다 읽은 뒤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잔학한 미얀마인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학살과 박해 이후에도 춤을 추는 로힝야 여성들의 회복탄력성이다. 전쟁과 학살의 피해자이지만, 불쌍한 피해자가 아니라 학살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주체로서 로힝야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전쟁과 난민, 그리고 여성의 경험


전쟁과 학살을 그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도식적인 방식은 (주로 국가나 민족으로 지칭되는) 집단의 피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피해에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상 또한 로힝야 민족이라는 전체 집단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여성'들에 집중한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 워크숍의 결과를 엮은 책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워크숍 프로그램을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기획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전쟁과 학살도 집단에 소속된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겪는 것은 아니다. 젠더, 계급, 인종, 나이, 장애유무 등 다양한 정체성에 따라 각기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 어떤 경험을 중심으로 전쟁과 학살을 바라볼 것인지는 전쟁과 학살, 그리고 그 이후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책이 여성들의 경험에 주목하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여성이 더 큰 피해자여서가 아니다. 이 책은 여성들의 회복탄련성을 주목했다. 평화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우리는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거대한 전쟁 앞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강대국의 정치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좌절 앞에서, 인간보다 수백 배는 크고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대량살상무기와 몇백억 혹은 몇천억이나 되는 그 무기를 생산하는 거대한 군수산업체의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 망연자실해지는 것이다. 학살 이후에도 생활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로힝야 여성들의 분투 속에는 그런 무력감이나 좌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는 로힝야 여성들의 일상을 보면서 평화운동이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자극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유혹뿐만이 아니라 쉬운 무력감이나 좌절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들의 경험에 주목할 때 보이는 것은 또 있다. 바로 전쟁과 학살이라는 더 큰 폭력에 가려진, 다른 큰 폭력이다. 로힝야 사회는 가부장제가 아주 심해서 여성들이 바깥일을 하거나 외출을 하려면 남편의 동의가 필요한다고 한다. 학살로 남편이 죽은 여성들은 이웃집 남자들의 도움으로 생필품 배급을 받거나 그런다고 하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학살이 여성들의 삶의 기반을 파괴하고 여성들은 강제로 새로운 삶에 내몰렸는데, 학살이 파괴한 것 중에는 여성들을 둘러싼 가부장제의 굴레도 있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폭력적인 가부장제로 신음하면서도 어떤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이동을 하는 등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미얀마에서 나는 그냥 로힝야 여성이었지만, 이곳에 와서 로힝야 여성 공동체에서 존중받는 '아푸(존칭)'가 되었고, 전문적인 일이 있고, 길거리를 활보하고, 남성들 앞에서 나의 NGO 활동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영어로 서명을 하게 되었다."(211쪽) 수십 년을 살던 고향 동네에서 쫓겨난 대추리 여성 농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미군기자 확장으로 쫓겨난 농민들은 더 이상 농사도 짓지 못하고 국가에서 시혜적으로 베푸는 공공근로로 먹고 살아가는 처지가 된다. 이는 분명히 삶을 박탈당한 일이고 굴욕적인 일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한 번도 자신의 재산을 가져본 적 없던 여성농민들에게는 쥐꼬리만 한 급여지만 공공근로를 통해 (처음 가져본 자신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된 자신만의 재산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경험은, 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일이 아닌가. 이처럼 여성의 경험으로 전쟁과 학살을 분석할 때 우리는 피해 집단 전체를 호명할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좀 더 입체적으로 전쟁과 학살을 분석할 수 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어쩐지 공부를 더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재현과 홍보에 있어서, 어떤 윤리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기 위해 책장에 꽂혀 있는, 아주 오래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타인의 고통>을 꺼냈다. 먼지를 털어냈는데, 다시 먼지가 쌓이기 전에 읽고 싶다. 그리고 난민에 대한 책들과 제노사이드에 대한 책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자 난민에 대한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데 이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난민 이슈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난민들의 피해사실에 주목하는 책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게 필요한 책들은 전쟁과 난민의 관계에 대한 책, 그리고 한국사회와 난민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우선 사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 <우리 안의 인종주의>와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부터 읽어야겠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책은 뭐를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아야겠다. 우선은 <로힝야 제노사이드>를 사기로 하자. 그런데 이 책들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한 두어 달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으면 좋겠다. 큰일 날 소리지만, 온종일 책만 읽을 수 있었던 감옥 시절이 조금은 그립다가, 올여름 폭염에 감옥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 얼토당토않다고 바로 지워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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