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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Feb 16. 2022

속껍질째 먹는 생밤 맛

청춘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거울

헤르만 헤세의 중단편 걸작 모음 『청춘은 아름다워』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자라고 생겨났다.
_p.246 「클라인과 바그너」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머리말에 나온 첫 문장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복숭아 익어가는 계절에 어울리는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을 읽고 헤세의 에세이와 시에 빠져든 시간도 좋았다.

헤르만 헤세의 중단편 걸작 아홉 편을 모은 『청춘은 아름다워』가 을유세계문학전집 11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담고 있다.

「나의 젊은 시절 이야기」(1923)는 헤르만 헤세가 1923년에 쓴 자전적인 글이다. 친가와 외가 가족의 이야기와 작가의 젊은 시절 일대기를 짧은 글로 정리했다. 작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자신의 삶이 책 마지막에 실린 '헤르만 헤세 연보' 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리석 공장」(1905)

「라틴어 학교 학생」(1905)

「시인」(1913)

「회오리바람」(1916)

「청춘은 아름다워」(1916)

「유럽인」(1917/1918)

「클라인과 바그너」(1920)

「유왕(幽王)」(1929)





책에는 헤세의 작품이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속에는 사랑을 경험하고 내면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인물은 청춘의 시기를 맞이하고, 또 다른 이는 청춘을 돌아보며 '내면으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맨다. 작가가 쓴 자전적인 글을 먼저 읽고 작품을 읽으니 내용이 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거울에 비친 다양한 얼굴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나씩 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옛날 중국의 시인 한혹의 이야기를 담은 「시인」과 주나라 유왕과 애첩 포사 이야기를 다룬 유왕(幽王)」이 분량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시인과 시에 관한 헤세의 생각을 담은 「시인」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스승이 사라진 오두막에서 혼자 눈을 뜬 한혹이 칠현금을 들고 고향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 '호접지몽(胡蝶之夢)’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와 나의 어린 시절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벌어졌다. 내 고향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난날들의 즐거웠던 일과 어리석었던 일들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버렸다.
_p.162 「회오리바람」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고향과 청춘의 시기를 통해 인생과 내면을 돌아본다. 회오리바람처럼 시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과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청춘만큼 강렬한 사랑으로 연결된 어지러운 내면세계를 마주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나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해도 유한한 것에 불과하고 정해진 끝이 있듯이, 내 기억에 나의 청춘 전체를 종결짓는 것처럼 보이던 이 여름도 하루하루 지나가 버렸다.
_p.211 「청춘은 아름다워」


"나는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서, 그 폭죽이 하늘 높이 치솟아 공중에 머물렀다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붉은 불꽃 비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청춘 시절, 눈부신 순간은 현실에서 더는 찾을 수 없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간 것을 돌이켜 보며 바라볼 뿐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에 기대어 바라본 풍경처럼, 강렬한 불꽃 같은 청춘은 다시 오지 않기에 더 간절하고 아름답다.




운명이 어디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자라났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
_p.252 「클라인과 바그너」


한때 젊은 날이 있었던 이제 정신없이 쫓기는 처지가 되어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은 클라인. 공금을 횡령하고 관리자이자 남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떠난다. 그는 두 남녀가 떨어졌다가 다시 엉키며 균형을 잃을 듯하다가 다시 잡는 춤을 보며 과거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온 생을 돌아본다. 타인의 춤을 시선으로 좇으며 잃어버린 청춘 시절을 떠올린다. 햇빛이 비치고 바람 부는 저쪽으로는 이제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람의 마음속엔 문제의 관건이 되는 모든 것이 있어서, 외부에서는 누구도 남을 도울 수 없는 법이다. 자기 자신과 투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
_p.280 「클라인과 바그너」


클라인의 머릿속은 실패로 돌아간 자신의 삶, 아내, 범죄, 그리고 아무 희망 없는 앞날이 뒤엉켜 혼란스럽다. 무대 위에서 스텝을 놓친 사람처럼, 그는 서서히 내면 분열을 경험하며 점차 시들어간다. "청춘 시절, 열광, 바그너 이 모든 것이 그가 잃어버린 것을 너무 생각나게 해 주었기에." 도망쳐 온 삶과 지금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결국엔 휩쓸려 사라진다.


헤르만 헤세는 『청춘은 아름다워』에서 장편보다 호흡이 짧은 중단편 분량으로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책에는 운명을 발견하고 새로운 얼굴로 낯선 삶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맞이하는 출생과 죽음, 그사이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다. 떠남과 돌아옴, 내면세계의 풍경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쉬지 않고 끝없이 쌓이는 시간의 흔적은 선명해졌다가 흐려지고 때가 되면 흘러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 깊이 바라던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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