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닮은사람
싱가포르는 단 하나의 계절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해 세상 모든 날씨를 보여준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먹구름이 끼고,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비바람이 불다가도 금세 날이 개고 무지개가 뜬다. 약속이 있는 날이면 고민이 시작된다. 우산을 챙길 것인가, 말 것인가.
일기예보는 오전 비, 오후 맑음. 아침 일찍 한 차례 비가 쏟아져 내린 까닭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며, 책 한 권 무게 정도 되는 우산이 무겁다고 놓고 온 것을 후회했다. 정류장에서 집까지 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이 정도 비라면 주머니 속 물건까지 홀딱 적셔 버린다는 걸 안다.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넣고 한두 걸음 정도 뛰었을 즈음, 알록달록 무지갯빛 우산이 머리 위로 씌워졌다.
며칠 전 이사 온 이웃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아이의 대화를 듣고 한국 분이시냐며 인사를 건넨, 예쁜 미소로 기억되는 인연. 내 쪽으로 한껏 기울어진 그녀의 우산이 다정했다. 우산을 놓고 나온 덕분에 차 한 잔 나눌 이웃이 생겼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기를 바라곤 한다. 만약 우리가 상상한 대로만 완벽하게 들어맞는 인생이라면, 며칠 못 가서 지루해지지 않을까?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변수가 싱가포르로 이주하며 세웠던 모든 계획을 무산시켰을 때 나는 좌절했다. 하지만 서둘러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나의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글쓰기’라는 선물을 받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의 틈새를 문장으로 채워나가며, 나는 비로소 내면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노력에 배신당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작은 오해로 가까운 이와 갈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또 이유 없는 다정을 나눠 받고 예상치 못한 행운이 제 발로 불쑥 찾아오기도 하는 게 인생이고 삶이니까. 내일 맑을지 비가 내릴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멈추지 않는 비는 없다.
삶이란, 가끔 우산 없이 비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 덕에 생각지도 못한 무지개를 발견하기도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