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귤, 화분, 커피 그리고 미역국
가끔은 말 없는 것 들로부터 받는 위로와 공감이 있다.
아끼는 책, 껍질 얇은 귤, 키우는 화분, 진한 커피 향, 그리고 미역국.
미역국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시린 날 찾아온 따뜻한 위로였다. 그때 나는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한인교회에서 운영하는 태교 교실을 다니고 있었다.
매주 예비 엄마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타지 생활의 유일한 활력소였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유산은 나를 차가운 병실로 밀어 넣었다.
수업에 빠지자 관계자분들과 다른 산모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안 보이세요?"
걱정 어린 안부들이었지만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혹여나 나의 슬픈 소식이 생명을 품고 행복해야 할 그들의 태교에 부정적인 영향이라도 줄까, 그들의 마음에 불안이라는 작은 그늘이라도 드리울까 염려스러웠다.
결국 차마 유산했다는 말은 꺼내지 못한 채, 그저 짧고 건조한 메시지를 보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앞으로는 못 나갈 것 같아요."
그 무심한 답장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병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떤 분이 이걸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남편과 연락이 닿아 소식을 알게 되었다며 건강해지길 기도한다는 메모에는 태교 교실 관계자분 성함이 적혀있었다. 보온병 뚜껑을 열자 구수한 냄새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미역국이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이곳 싱가포르에서는 미역국 한 그릇을 끓여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재료 하나를 구하려 해도 일부러 한인 마트를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끓인 미역국을 데스크에 맡기고 간 것은 분명 헝클어진 모습으로 슬퍼할 힘조차 없는 나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백 마디 말로도 다 전할 수 없는 따뜻한 위로가 마음의 상처 틈새로 스며들어 아픈 곳을 조용히 다독였다. 무언의 미역국은 싱가포르에서 내가 받아본 가장 다정한 문장이었다.
때로는 말 한마디 보다 다정한 눈빛이나 따뜻한 온기에 위로받는다.
책, 귤, 화분, 커피... 그리고 미역국
말없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을 나열하다가 목록 맨 마지막에 미역국을 적어 넣는다.
병실 밖에 맡겨진 따뜻하고 다정했던 미역국 한 그릇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