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 자산가는 5달러짜리 바쿠테를 먹는다

프롤로그

by 그리고

아무리 싱가포르 물가가 비싸다지만 그래도 남편 연봉이 한국보다 1.5배나 오른다니까, 세 식구 생활비 제하고 남는 돈으로 미국 주식을 사모을까 ETF를 살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고민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렌트비와 아이 국제학교 학비를 제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아반떼'를 가장 비싸게 사야 하는 나라이다. 아반떼 한대를 뽑으려면 1억 5천만 원을 줘야 하는 미친 물가의 도시에, 우리는 맨몸으로 떨어졌다.


당연히 차는 꿈도 못 꿨기에 거주지의 위치가 중요했다.
​우리가 구한 집은 도로 바로 옆에 붙은 콘도였다.

콘도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남편 출퇴근에 용이하고 아이 유치원은 도보로 가능한, 넓은 테라스가 딸린 꽤 괜찮은 집이었다. 인기 없는 1층이라 당시 월세는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 7년이 지난 지금은 500만 원으로 뛰었지만, 여전히 '가성비' 소리를 듣는 곳이다.


이사​ 첫날부터 1층을 기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를 이사업체 인부는 아무렇지 않게 맨발로 밟아 죽였다.

그리고 발바닥에 붙은 것을 손으로 떼어, 다용도실 벽에 붙은 작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툭 던졌다.
그 문은 쓰레기 투입구로 열기만 하면 지하 쓰레기 처리 공간으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쓰레기 투입구는 ‘바선생’들의 주요 이동 통로였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문을 열면 그것들은 집안으로 튀어 들어오곤 했다. 결국 나는 그 문을 테이프로 단단히 막았다. 벌레와의 '합방'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몸이 고생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직접 지하로 내려가 쓰레기를 버렸다.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갈 때마다 마주치는 이웃들이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K-레이더'로 0.5초 만에 한국 사람임을 직감한다. 우리 민족에게 이 눅눅하고 비위생적인 공간은 매일의 고역일 터. 숨을 꾹 참고 후다닥 '거사'를 치른 뒤, 에어컨 바람을 향해 도망치는 뒷모습에 묘한 동지애와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그렇게 싱가포르의 첫 집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거실 한복판에 무심하게 쌓여있는 박스탑을 하나씩 개봉하고 정리했다. 허기가 지는데 라면 끓일 냄비는 대체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쭈뼛쭈뼛 콘도 바로 옆 호커센터(푸드코트)로 갔다.
​점심시간 호커센터는 도떼기시장이었다.

근처 닛산 서비스센터 직원들이 단체로 몰려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오가고, 중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들려오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메뉴들로 가득한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볶음면’ 하나를 주문했다.
주문은 성공했는데 ​앉을자리가 없었다.

쟁반을 들고 서성이다가, 더운 날 명품 브랜드 스카프를 두르고 혼자 바쿠테(돼지 갈비탕)를 드시고 계신 할머니께 조심스레 합석여부를 여쭤봤다.
그녀는 내게 살짝 웃어주며 앉으라고 손짓하더니 물었다.

"이 근처 살아요?"

- 방금 이사 왔어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한다며, 나에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우리 집에서 나랑 한 시간만 놀아줄 수 있어? 한국어 좀 가르쳐 줘."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우리 콘도 바로 뒤편, 숲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우리 동네 도로가에 늘어선 콘도들을 지나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에서 멀어질수록, 숲이 우거진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진짜 부자들이 사는 대저택(Landed House)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녀는 그 깊은 숲 속, '부촌'에 사는 자산가였다.
알고 보니 우리 콘도 옆 그 허름한 호커센터는 잡지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바쿠테 맛집이었고, 그녀는 그 맛이 그리워 마실을 나온 참이었다.


​시끄러운 도로가 콘도 1층에 에 갓 이사 온 한국인과,

고요한 부촌에서 호커센터로 바쿠테를 먹으러 나온 싱가포르 대저택 안주인. ​

우리는 그렇게 5달러짜리 식탁 위에서 만났다.


이 이야기는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가던 미지근한 온도의 외국인, 365일 뜨거운 적도의 나라에서 치열하고 뜨거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한 이야기다.


​자, 이제 까면 깔수록 매력적인 나의 싱가포르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당신을 둘러싼 단단한 알을 깨고, 진짜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은 1층에서 탈출해서 대저택(Landed House)들의 지붕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층에서 살고 있다.

* 바선생은 탑층 에도 있다. 출연 빈도가 낮을 뿐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