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눈이 가르쳐준 진짜 낭만
싱가포르에는 사계절이 없다. 일 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공기는 늘 뜨겁고,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은 달력의 숫자뿐이다. 본래 늪지였던 땅을 깎고 바다를 메워 세운 이 정교한 인공 도시의 사람들은 자연이 주지 않는 것을 스스로 설계하고 만들어내는 데 익숙하다.
인공적인 도시의 절정은 연말에 찾아온다.거대한 쇼핑몰 광장 앞, 인공눈 기계가 공중을 향해 하얀 거품을 뿜어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호한다. 한국에서 진짜 겨울과 눈을 경험한 내 눈에는 그것은 그저 습기에 금세 녹아버릴 세제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반짝이는 트리 사이로 눈이 흩날리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까치발을 들어 그 거품을 손바닥에 받아내려 애쓴다. 땀이 흐르는 등 뒤로 캐럴이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이들은 잠시 적도를 떠나 어딘가의 겨울 속으로 이동한 듯했다. 모두가 그것이 진짜 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기꺼이 그 장면을 믿어준다. 전기로 돌아가는 기계가 만들어낸 거품일지라도, 그 아래에서 피어나는 감정까지 가짜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낭만이란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겨울을 가질 수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겨울을 만들어낸다. 결핍을 인정하는 대신, 상상력으로 그것을 채워 넣는다. 싱가포르에 눈이 내리던 날, 금세 사라지는 거품을 손에 올려다보던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진지하고 또 환했다.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 만들어낸 계절을 진심으로 살아 내고 있었다.
흐린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아도 구름 뒤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듯, 우리가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낭만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므로 삶이 부족해 보일 때일수록, 우리는 상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치 수용소의 혹독한 현실을 견뎌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선택하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상상은 현실을 도피하는 문이 아니라, 오히려 척박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가장 단단하고도 조용한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면에 자신만의 설원을 품고 있다면,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우리는 기어이 겨울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상상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계절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풍경으로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