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일곱 번째 여름, 또다시 싱가포르

by 그리고

​한국과 쿠알라룸푸르에서 날아온 이직 제안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간들이 끝났다. 길었던 저울질의 결론은 결국 다시 이곳, 싱가포르.


​결정을 하고 나니 후련함보다는 마음 한구석에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차라리 애초에 아무 제안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난 몇 달간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핑계로 삶은 유예되었고, 이곳에서의 일상의 밀도는 옅어졌다. 마음을 다 주지 못해 겉돌았던 모임들,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 더 깊이 마음을 나누고 챙겼어야 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를 이토록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가두어버린 얄궂은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야 할 수도 있기에 6개월만 연장했던 집 렌트 계약을 다시 이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2년 재연장하게 되었다. 계약을 완료하자 내 안에서는 묵직한 안도와 알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사실 이 기쁨은 꽤나 낯설고 아이러니하다. 매달 치러야 할 렌트비가 줄어든 것도, 집이 조금이라도 넓어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집, 같은 비용. 삶의 물리적 조건은 단 1그램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이 완벽한 무변화 앞에서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삶이 내게 건넨 답은 바로 이것인가 보다. 환경을 통째로 바꿔주는 대신, 내가 발 딛고 선 이 평범한 현실을 전혀 다른 해상도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준 것.


어쩌면 그 길고 답답했던 정체의 시간은, 내게 주어진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내면의 '뜸 들이기'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선이 바뀌니 곁에 있던 것들이 제 빛깔을 내며 다가온다. 묵묵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남편이 고맙고, 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해내는 아이가 대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저녁 우리 가족이 돌아와 쉴 수 있는 넓진 않지만 충분히 아늑한 집이 감사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변했다. 떠날 핑계만 찾던 시선을 거두고, 지금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와 감사를 비로소 스스로 찾아낸 것. 이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그동안의 고민과 원망의 시간은 충분히 제값을 다한 것 같다.


단 한 뼘도 달라지지 않은 익숙한 세계에, 완전히 달라진 내가 두 발을 딛는다.

이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모든 것이 변해버린 나의 오늘을, 아낌없이 정성껏 살아낼 차례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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