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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pr 04. 2024

왜 나는 그의 글을 사랑하는가

결국은 내 마음 (그쵸? 알랭드 보통 작가님?)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어려워하는 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어딜 가나 당당하게 '장강명 작가님'이라고 말하지만, 작년 이맘 때만 해도 뚜렷하게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없었다. 그만큼 내게 '가장'이라는 건 무겁고 책임감 있는 수식어였다. 말 그대로 '가장'이어야 하니까.

(과연 이번 글에 '가장'이라는 부사가 몇 번 들어갈 것인가)


장강명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말'에서 꼭 언급되는 한 문장이 있다. HJ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HJ는 작가님의 아내다. 부족한 자신의 곁을 내내 지켜주고 응원해 준 아내에게 늘 감사하다는 문장이 마치 하나의 인장처럼 단행본마다 콕콕 박혀있다. 그는 한결같이 그래왔고,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담을 때도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로맨티스트 같은 면모까지 다 좋았다. 자 이쯤 되면 오늘의 글은 결국 장강명 작가님의 극찬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오늘의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다. 작가님의 글도 아니다. 나의 JH가 쓴 글이다. 나는 그의 글을 오랫동안 읽어왔다. 지금은 그의 계정이 사라졌지만(그가 없앴지만), 사라지기 전 그의 글을 꽤나 애정하는 독자였다. 관계가 형성되기도 전 이야기다. 누군가는 "왜?"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삶에 있어 나 또한 "왜"라는 질문은 꽤나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하지만 때로는 그 "왜"가 없는 경우도 생긴다. 있었다가 사라진 경우도 생긴다. 그는 종종 내게 자신이 읽은 책의 감상을 전한다.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는데, 그가 보낸 이번 글이 유독 더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올해 초에 다녀왔던 <바다에 내리는 눈>에서 책 교환을 하며 내가 직접 선물한 "노멀 피플"의 감상이기 때문일 테다.






여유있을 때 천천히 읽어요. 내가 보내는 글에 굳이 답장 안 해도 괜찮으니 부담이 아니길 바라요.
어제 <노멀 피플>을 다 읽고 잤어요. 좋은 소설이에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되고 읽게 된 소설이라 더 특별하고 고마워요.



책을 절반 정도 읽었을 즈음 생각했다. 아마도 긴 글이 될 것 같다고,


장면1)

과거 연인이었던 사람에게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들은 이야기 중 잊히지 않는 하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관련되어 있다. 그녀의 모친은 드라마 속 지안을 보면 고생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힘들어한다고, 혹시 오빠도 그러하냐고 천진하게 내게 물었다. 평소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경제력이라는 단어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였으니 궁금하기도 했겠지. 어떤 예상 답안을 가지고 질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내 대답은 ‘아니오’였는데, 나의 가난과 고통은 극중의 지안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축복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당시 내가 느끼는 가난이었다. 더불어 궁금했다. 그녀의 모친은 대체 어느 정도로 힘겨웠기에 지안을 보고 고통을 느꼈던 걸까,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정도의 가난이 가능한가 등등에 대해. 내가 공감하기에는 지안의 가난은 너무 컸다. 보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이 소설의 코젤을 보며 생각한다. 코젤의 상황이 내가 공감하기 딱 적당한 정도의 가난이라고. 학창시절 빈부의 격차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대학에 간 이후 숨 쉬는 것조차 돈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점점 그것에서 소외된 또는 스스로 소외되어 가는 것을 느끼는 모습. 물론 코젤의 캐릭터를 ‘가난’이라는 단어로 납작하게 표현하는 것은 부당하다. 더 복잡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장면2)

언젠가 독서모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던져진 적이 있다. 어떤 모임에서 어떤 맥락으로 나온 질문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 내가 했던 대답은 기억난다. 불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는 있다. 이 무슨 해괴한 말장난인가 싶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생각할 때 구원은 하겠다 또는 받겠다는 의지가 개입하는 순간 실패다. 구원은 좋은 관계 속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고 감정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코젤과 매리앤은 서로에게 깊은 끌림을 느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끌림 속에서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구원했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느끼는 어려움이나 문제가 그(녀)와 있을 때는 전혀 어렵지 않고 문제되지 않는 관계. 구원은 거기서 일어난다.


장면3)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촉발된 나 혼자만의 오래된 논쟁. ‘사랑은 대상의 문제인가? 태도의 문제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한결같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로 시작해서 태도의 문제로 끝난다.”

코젤과 매리앤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며 서로에게 깊은 끌림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다른 연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들과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인 것 같지 않을 때가 있”(p.283)다고 느끼는 반면 서로와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 온전히 자신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함께임에도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데, 둘은 함께일 때 결코 외롭지 않다.

처음 제기한 질문과 다른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사랑이 태도의 문제라면, 나의 태도가 대상을 결정하는 것인가? 대상이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인가?’

세상에 완벽한 이론이나 가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적어도 자연과학의 분야가 아니라면. 난 앞으로도 사랑을 탐구할 테고, 그 과정에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하고 수정하고 보완하겠지만, 그 긴 탐구의 여정에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면4)

그녀는 내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참 똑똑해. 맥락을 잘 짚어. 그래서 대화가 잘 돼.”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그녀를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매리앤은 코젤 외의 다른 이성들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생각이 얕고, 대화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 보이는 단순한 남자들. 오직 코젤과의 관계에서만 편안함을 느끼고 자유롭다. 코젤만이 매리앤을 억압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성향을 존중하고 또 본받으려 한다.


10대 학창시절에 만나 서로에게 깊은 끌림을 느끼는 코젤과 매리앤. 이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켜보고 응원하는 관계. 서로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용기 내지 못하는 둘의 두려움도 이해되고, 그럼에도 결국은 서로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음 또한 공감되어 너무너무 즐겁게 읽은 소설.


이 소설의 정수는 다음 문장에 드러난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들을 내리고, 그러고 나면 삶 전체가 달라진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야…(중략)… 하지만 지금껏 넌 나한테 대체로 아주 좋은 영향을 미쳤고, 나는 내가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네 덕분이지.”(p285)


세상의 누군가 ‘연애소설’의 가치를 폄하하곤 하는데, 반문하나니 세상에 사랑보다 중요한 가치가 존재하는가.







나는 그가 보낸 긴 메시지를 읽고 더 긴 답장을 보냈다. 나에게 '장문'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장본인이기에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분량이라 생각하고 보냈지만 역시나 길었다. 카톡에 글자 수 제한이 있었다면, 나는 여러 번 짤렸을 테다. 뚝뚝 끊어서 보내야 했겠지. 짧게 오가는 속도감 있고 단편적인 대화보다 긴 문장에서 오가는 진중함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나다. 이 정도 분량의 글을 카톡으로 매일 주고받는 관계라면, 나는 그의 글을 온전히 사랑한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 혹은 더 길게 화답하곤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길고 긴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조심스레 바라게 된다. 전에 어떤 독서모임에서 이상형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런 답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좋다'고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변해가기 마련이고, 이 관계 또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도, 나도. 그럼에도 이 글을 추억처럼 남기는 건, 이건 그의 글이기도 하지만, 그가 내게 선물해 준 나의 추억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훗날 이 관계가 틀어지고, 흑역사로 남게 된다 할지라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다시 웃을 수 있도록, 하루의 소중함을 인장처럼 또 이렇게 새긴다.



덧, 나는 글자 수 제한이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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