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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05. 2024

상대를 오독할 자유

저도 저를 잘 모르는데요

그러나 문자해득력은 문장해득력과 다르며, 책(글)을 쓰인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저 역시 어려운 글도 아닌데 엉뚱하게 이해하거나, 전체 문맥과 상관없이 특정 문장이나 낱말에만 매달려 글쓴이의 뜻을 정반대로 해석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문학평론가 J.힐리스 밀러가 말했듯,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독자에겐 자유롭게 오독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책 먹는 법> 김이경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찰나의 순간,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을 강렬하게 스치고 지나갈 때. 그럴 때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그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다듬어 활자로 정리하고 싶어진다. 장강명 작가님은 쓰고 싶은 글의 단상이 떠오를 때면 녹음기능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뭐랄까. 이상하게도 그 생각(상상)들을 막상 입으로 뱉으려 하거나 타이핑을 시작하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그 문장들이 마음처럼 잘 표현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마치 지난밤 꿨던 꿈을 누군가에게 막상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히거나 무언가에 홀린 듯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오늘의 이 글도 그렇게 시작됐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타인들의 오독이 싫어졌는데, 이건 책에 대한 오독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오독을 말한다.


이를테면 가족. 흔히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란 착각을 많이들 하던데, 내 경우 그거야말로 뿌리 깊은 오독이 아닌가 싶었다. 몇 십 년을 가까이 지내면서 타자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그걸 명확히 인지하지 못해 벌어지는 지난한 싸움을 난 오랜 시간 견뎌왔고, 그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같은 공간에 붙어산다고 곁에 있는 이의 깊은 속마음을 온전히 다 안다는 건, 한 인간에 대한 지나친 오독이라는 걸 말이다. 근데 이 비극이 비단 관계에 소홀해진 경우에만 생기던가? 다시 또 생각을 정리하자면 '아니다'에 가깝다. 오래 알아왔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나를 혹시 이런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나?'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경우 나는 상대가 나를 오독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이 대화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미 없는 힘겨루기가 아니라 혹시 나를 그런 사람으로 잘못 이해(오해) 하고 있는 거라면 바로잡아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콕콕 짚어주면서 말이다. 유독 나의 민감함을 건드리는 어떤 주제들이 있는데, 보통 그 주제에 닿았을 때 상대가 나를 오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욕구가 치고 올라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꽤 격렬해진다. 평소에는 가만가만 말없이 잘 돌아다니다가도 어떤 대화에서 유독 날이 서는 느낌이 드는데, 그 지점이 건드려졌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떤 A가 기억하는 나는 말없이 차분하고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고, 어떤 B가 기억하는 나는 장난기 많고 사람들을 좋아하며 몰입하는 대화에 열의를 띄는 사람일 테다. 일례로 회사에서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모임에서 보여지는 나의 모습, 가까운 이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은 다 다르다. 지난 독서모임에서 서로의 가면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내 가면이 꽤 여러 개인 사람이다.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나의 모습을 어디까지 드러낼까를 감안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20살의 기억으로 돌아가 본다. 어릴 때부터 사진에 흥미를 느꼈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가장 먼저 사진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은 나이대가 다양했다. 적게는 한두 살, 많게는 대여섯 살 정도였고 대체로 남자가 많았다. 사진이라는 분야가 예술성 있는 분야라(는 나름의 핑계를 대보자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동아리는 술자리가 잦았다. 그리고 (남자)선배들은 술에 취할 때면 종종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면서 이제 막 20살이 된 (여자)신입생들을 웃기려 했는데, 내 경우 그걸 받아주는 살가운 후배는 아니었다. 옆에서 꺄르르 꺄르르 웃어대던 다른 여자 동기들과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술만 마시는 내 모습이 쉽지 않았던 건지, 그들이 기억하는 나는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나를 어려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이 묘사하는 나의 모습은 "해연이는 말에 칼이 있다"였다.


반면에 나와 유독 친했던 (남자)선배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동기들이 나를 그렇게 묘사할 때면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나는 수다쟁이에 자신과 대화 코드도 잘 맞고, 수더분한 (여자)후배였으니까. 이렇듯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는 온도차가 큰 사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더 선명하게 온도차를 드러내는 중이다. 어떤 이에게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한없이 관대해지는 내가 있다면 또 어떤 이에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단 한 뼘의 틈도 없는 단호한 내가 있다. 덕분에 어릴 때 만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독한X이라는 말도 종종 들었더랬다. 물론 당시에도 그들의 말을 굳이 정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마 그 아이들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은 독했을 테니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이 모든 상황은 그들이 나를 오독한 게 아니다. 나는 어떤 무리에서는 독한 사람이길 바랐고, 또 어떤 무리에서는 유순한 사람이길 바랐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바랐던 나의 모습이자 가면이기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그런 모습을 의도하고 했던 말이 아닌데 누군가 나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로잡고 싶어진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린다. 그럴 때의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나를 오독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한참을 떠들며 말을 덧붙이다 이내 혼자 지쳐 입을 꾹 닫아버리는. 오독당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 상대가 나를 정확하게 인지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오늘 길을 걷다가 문득 생겨버린 거다. 아마 이 생각이 더욱 확실하게 머릿속을 지배했던 건 어젯밤 오랜만에 아빠,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다음 달이면 (친)오빠가 결혼을 한다. 나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 기쁜 소식이다. 비록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얘기고. 오빠는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좋은 사람을 만나 작년부터 차근차근 결혼을 준비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오빠의 결혼식과 관련해 나에게 어떠한 역할이 부여된다면 마다할 이유 또한 전혀 없다. 얼마든지 내 시간과 돈을 다 쪼개서라도 이 기쁜 행사를 축제로 만들고자 할 의욕이 충만한 상태다. 그래야 오빠가 행복할 테고, 나는 오빠의 행복을 온 마음으로 바라고 있으니까.


근데 어제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이것저것 나에게 부탁할 거리를 말씀하시는 두 분의 목소리에 주저함이 묻어나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나는 두 분의 말씀에 물음표가 떴다. '왜 내가 이 상황에 호의적으로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지?'하고 말이다. 부모님에게 나는 대체 어떤 딸일까. 가족일에 늘 질겁하는 사람? 가족들을 싫어하는 사람?

언젠가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엄마는 내가 가족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놀랐었다. 싫어했으면 이미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아직도 어릴 때처럼 나를 교정하려 들거나 강압적인 말과 행동으로 휘어잡으려 들 때면 그것만큼은 이제 참지 않을 뿐이다. 강하게 몸을 비틀어 가족들에게서 나를 분리시켰고, 그 과정에서 엄마가 나를 오독했던 걸까 싶었다.


그래서 다시 나의 결론. 결국 타인은 나라는 존재를 오독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건 필연적인 일에 가깝다. 나 또한 타인을 수없이 오독하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 거기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난달에 다녀온 장강명 작가님의 북토크에서도 내가 불쾌했던 지점은 작가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작가님의 말씀을 속단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불편함이었다. 그러니까 작가님은 매 순간 누군가의 오독에 자신을 해명하는 과정을 거쳐왔을지도 모른다. 특히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을 때는 더했을 테지. 그럼에도 그분의 침착한 대응이 놀라웠다. 존경스러웠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흔들어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공격한 타인이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 해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는 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여전히 나라는 인간을 모르겠다. 최근에 알게 된 누군가는 '책을 읽는' 나의 정체성이 흥미로웠던지 호기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책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이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는데, 그때 나눈 대화 덕분인지 놀랍게도 그가 정말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평소 읽지 않던 (고전)책도 읽기 시작했다며 자랑하듯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책과 관련된 이야기 앞에서만큼은 참지 못하는 내 기질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평소와 다른 텐션으로 신나게 대화를 이어가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한 발짝 다가오는 그 사람의 친근한 태도에 뒤늦게 화들짝 놀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두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장황한 글의 결론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핑계이자 낙담의 결과물이다. 내가 평소 자주 언급하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의 다음과 같은 문장처럼 말이다.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


늦은 저녁,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어린이날 선물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건 상대의 오독인가, 나에 대한 호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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