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덜 걸었다고
이젠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어제가 다 닳아서
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누지 않고 돌보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런 이야기
누군가가 제멋대로 들어도 좋을 이야기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
_안미옥, 「폭우와 어제」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하! 이번이 벌써 두 번째,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다행히 아직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걸어온 길이 꽤 멀긴 했지만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기도 했고, 이 상태로 출근하는 건 무리다 싶어 발길을 돌렸다. 왼쪽 다리를 직직 끌다시피 하며 느린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름에는 샌들을 신고 겨울에는 운동화를 신는다. 걷는 걸 워낙 좋아하는 터라 사시사철, 하루 만보 이상씩은 무조건 걷는다. 날씨가 좋으면 계절을 온전히 감각하며 걸었고, 날씨가 흐려도 실내 어디든 꼭 걸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의 걷기 루틴은 몇 년 동안 변함없었다. 심지어 3년 전이던가? 회사 회의실 문에 엄지발가락이 끼는 바람에 응급실에 가 발톱을 다 뽑고 꿰맸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걸었다. 붕대를 감고 헐렁한 신발을 신고서 말이다.
문제는 이렇게 걷기를 좋아하다 보니 운동화는 괜찮은데 샌들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은 물건 하나도 조심스럽게 쓰는 게 습관인지라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은 대체로 수명이 길다. 하지만 샌들은 거진 1년에 한 켤레씩은 바꿔줘야 했다. 물욕이 없는 편이라 하나를 사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 물건만 고집하는 편인데, 샌들만큼은 예외였다. 운동화처럼 튼튼하지 못하다 보니 한참을 걷다 끈이 툭툭 끊어지기 일쑤였고, 그나마도 기미나 보이다 끊어지면 다행이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길거리에서 '투둑'하고 끊어지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올해만 벌써 두 번째다. 보통 여름이 다가올 때쯤 한 켤레를 장만해 두는데, 이번에는 한 달도 신지 못한 시점에 끊어졌다. 심지어 그다음에 구입한 샌들마저 출근길에 명을 다한 것이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고 말이다. 비 때문일까. 이상기후로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가 이제 샌들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일까. 못해도 한 해는 버텼던 샌들이 연달아 툭툭 끊어지니 당황스럽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이 상황이 어찌나 웃기던지.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계시던 어떤 어르신은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하셨던지(저 아가씨는 왜 저리 다리를 저나...),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셨다. 나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새 신발을 주문했다.
익숙하게 반복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건 한순간이다.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소모품이 예고도 없이 망가지면 이렇게 곤란한 순간이 생긴다. 그제야 비로소 그 물건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에게 샌들은 여름을 위한 신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되도록 발이 편했으면 좋겠고, 굽이 없었으면 좋겠고, 물이 닿아도 튼튼했으면 좋겠고, 쉽게 때가 타거나 지저분해지지 않는 재질이었으면 한다는 것. 이 모든 조건은 걷기를 위한 최소한의 조합이었다. 그다음이 디자인. 계속 그랬다. 가격도 비싸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년 같은 쇼핑몰에서 구입했다. 디자인도 무난하고 가격도 적당하다 여겼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상의 미세한 균열.
규칙적인 일상이 나에게 안정감을 줬다면, 이렇듯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균열은 익숙했던 일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샌들 하나에 이토록 깊은 마음을 담는 건, 그만큼 샌들을 아꼈기 때문이 아니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어떤 것의 부재가 새삼스럽지만 묵직하게 존재가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샌들 한 켤레도 이토록 중요한데, 하물며 나의 일상을 채우는 다른 것들은 어떨까. 다시금 돌아본다. 지금 내가 익숙하게 혹은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말이다.
그날의 출근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신기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상의 어떤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을 걸어가던 여고생이 뒤로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메더니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와 보폭이 같아 여고생의 모습이 계속 내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녀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고데기였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걸어가는 사람은 봤지만, 이건 또 새로웠다. 고데기는 보통 코드를 꽂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여고생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걸어가면서 고데기로 앞머리를 말아 웨이브를 주기 시작했다. 맙소사. 역시 내가 사는 세상 속 익숙함은 나에게만 한정이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