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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l 28. 2024

시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하려고요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 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_함민복, 「긍정적인 밥」



2주에 걸쳐 시 강연을 듣고 왔다. 한 주는 하상욱 시인, 또 한 주는 박준 시인. 같은 시인이지만 너무도 다른 결의 두 사람을 만났다. 이번 강연들은 <소소한 아지트>를 통해 신청했다. <소소한 아지트>란 용산구 용마루길 상권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매달 새로운 문화, 교육, 체험 이벤트 클래스가 진행되며 공간 대관도 무료로 지원하고 있다. 나는 이곳을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됐고, 7월의 클래스를 보다가 하상욱 시인과 박준 시인의 클래스를 발견하고 신청한 것이다. 처음에는 신청을 할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강연을 다 듣고 돌아오던 길에 든 생각은 '신청하길 잘했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번의 강연 모두에서 나는 그분들의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한 번은 나의 질문이 좋아서, 또 한 번은 가장 일찍 와서. 선물을 받을 생각으로 했던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두 번 모두 평소처럼 해오던 행동인데, 뜻밖에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덕분에 내 책장에 시집이 두 권 더 늘어났다. 집이 좁아 웬만하면 구입하기보다는 도서관 대출이나 전자책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시인들의 친필이 담긴 시집, 그것도 그분들이 직접 전해주신 시집이라 의미가 깊었다.





삶에서 문학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 무용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나는 왜 이렇게 몰입하나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는 나, 여기서 말하는 '무용하다'의 의미는 남들 기준에서의 무용함이지 내 기준에서의 무용함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변함없이 나만의 고루한 감각을 지켜왔으니까.


어릴 때, 창원에서 10년 정도를 살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하지만 그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어릴 적 추억의 전부인 곳인데,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그곳을 떠난다는 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의 절절함(차라리 저를 두고 가세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로 상경할 마음에 온통 들떠계신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설렘에 재를 뿌리고 싶지 않아 고집스럽게 버티기를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다만 의식이 필요했다. 이 동네를 떠날 마음의 준비 같은 것. 그래서 아빠와 함께 아빠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챙겨 들고 동네를 거닐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휴대폰 사진이 지금처럼 상용화되지 않았던 때라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현상하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학교의 운동장 사진, 집 근처에 있는 나무, 매일 등하교하며 걸었던 길, 자주 뛰어놀던 놀이터 등. 추억하고 싶은 나만의 소중한 장소들을 사진으로 한 장 한 장 담았다.


그렇게 창원을 떠났다. 늦은 밤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 날이 되자마자 근처 사진관부터 찾았다. 현상을 맡기고 사진이 다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는 아빠와 함께 사진관으로 향했다. 현상 비용이 생각보다 높았는데, 아빠는 사진을 한 장씩 보시더니 도대체 이런 사진을 왜 찍었냐고 나를 타박하셨다. 사진을 찍을 당시 분명 나와 함께 계셨는데, 뭔가 특별한 걸(내 기준에서는 특별했지) 찍는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하지만 막상 사진에 담긴 나무와 길, 운동장, 놀이터, 학교 등은 아빠가 보기에 등장인물도 없고 서울에도 널리고 널린 무용한 것이었으니. 돈을 내는 입장에서 기분이 언짢으실만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흘러, 사준 인형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고, 사랑의 눈길을 보내며 쓰다듬는 나에게 그동안 많이 적응하셨지만, 그날의 사진들로 또 다른 충격을 드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딸은 자라서 여전히 그 감각을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좋아하는 나무를 만나면 가만히 들여다보고, 가까이 가서 사진도 찍어보고, 놀이터 그네에도 앉았다가 하늘도 한 번 올려다봤다가, '아 기분 좋다'라고 중얼거려보기도 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촌스러운 감성의 소유자(나야 나 나야 나).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바람의 향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같은 장소를 산책하며 걷다가도 어제와는 또 다른 미묘한 변화에 그 잔상이 떠나지 않아 혼자 배시시 웃으며 걸음이 느려지곤 하는.


이번 강연도 그래서 좋았다. 특히 박준 시인 같은 경우,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과 인사하는(소리만 안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름이 '나물이'라고 했는데, 지나갈 때마다 속으로 '나물아 안녕?'이라고 중얼거린다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어떤 의미로는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 감성을 아는 사람이라서. 그의 강연에서는 '공감론'이라는 시험도 봤다. 회색똥종이(갱지라고 하죠) 재질의 시험지가 오랜만이라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제1교시, 홀수형, 가형 등의 궁서체가 낯이 익어 다시 또 웃음이 났다. 그와 문제풀이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들었던 말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준 시인은 말 그대로 시인이다.

그럼 그가 하루에 시를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답은 놀라웠다. 단 20분.

24시간 중에 20분 시를 쓰는 걸 보고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을 수 있다. 그는 뒤이어 말했다. 이 20분은 하루 중 온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라고. 적어도 창작 안에서만큼은 (세상적인) 욕망을 부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신을 당당히 '시인'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루 24시간이 오직 해야 할 일로만 채워진 삶(효율성만을 따지는 삶)은 공허하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시인이지만, 시를 쓰는 것보다 더 큰 지분의 다양한 일을 담당하고 있다. 출판사에 출퇴근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직업적인 정체성은 그 일을 할 때만(경찰은 경찰일 때만 경찰다워야 한다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유효하도록 설정한다고. 평소에 뭘 해 먹고 사는지 전혀 감이 안 오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고작) 하루에 20분 시를 쓰지만 시를 쓰는 시간만큼은 그는 시인이다. 다른 일을 할 때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얼마 전에 <공감의 반경>이라는 책을 다 읽고 독서와 문학의 효용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 두 가지가 공감력을 키우기 위한 좋은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순기능이 바로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자연스레 길러진다는 것인데, 이번 강연을 다녀와서 문학의 가치를 하나 더 배웠다. 삶에서 문학을 놓지 않는 나의 어떠한 모습들이 주변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말이 추가됐다. 문학을 공부하고 읽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고유한 색감이 있는데, 그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으로 퍼져간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몰랐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우선은 내가 먼저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혹 나로 인해 퍼져갈 어떠한 색감이 혼탁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맑을 수 있도록 말이다.



독서의 효과는 한마디로 우리를 똑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독서의 사고력 측면이다. 그렇다면 독서가 우리의 정서적, 인지적 공감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수많은 연구가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독서는 공감력을 향상시킨다.
예컨대 어떤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소설책을 주고 9일에 걸쳐서 매일 책의 1/9씩을 읽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마다 그들의 뇌를 관찰했다. 그 결과 책을 읽는 9일 동안 좌각회/연상회라고 부르는 부분과 내측 전전두피질 간의 연결이 강해졌다. 좌각회/연상회는 글의 이해 및 공감과 관련된 뇌의 영역이고 내측 전전두피질은 공감, 연민과 같은 사회적 정서 반응 및 기억력을 관장하는 부위다. 이 부위의 연결이 강해졌다는 것은 글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생각, 감정, 지식 등을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인지적 공감이 향상된 것이다. 더욱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한동안 체성감각피질과 후두엽에서의 연결 강도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는 마치 주인공과 같은 행동을 한 것처럼 그 활동 상황이 실제 뇌 속에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런 연결이 독서가 끝난 후에도 지속된다는 사실은 결국 독서가 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공감의 반경> 장대익



끝으로 박준 시인은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쓸 것이라 말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순수하게 하고 싶은 무언가가 그에게는 시였다. 나에게는 읽고 쓰고 걷는 삶이 그 가치이지 않을까. 명사가 아닌 동사의 형태로 존재하는 삶.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것, 어떠한 강요도 부담도 없는 나만의 놀이, 나만의 감각. 이제 막 5회차를 맞이한 독서모임 또한 마찬가지다. 이걸 너무 잘 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언젠가는 탈이 날 테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고유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다. 세상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이 영역 안에서만큼은 나의 순수함을 올곧게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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