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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Jul 26. 2020

먹는 이야기가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vol.1. 밥

오랜만에 고대영 작가의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를 책장에서 꺼냈다. 지금 열 세 살인 호영이가 일곱 살 무렵 자주 보았던 그림책이다. 둘째 서빈이가 이제 일곱 살이 되었으니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으로 다시 펼쳤다. 당시에 한 권씩 나올 때마다 구비해서 집에 일곱 권이 꽂혀 있다.      


「먹는 이야기」를 아이랑 함께 보았다. 가족과 밥이 연결되는 이야기이고 배경은 주방과 식탁, 먹는 장면이 주로 나온다. 그런데 예전에 아이랑 공감하며 읽었던 이 그림책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딸아이에게 읽어줄수록 내 마음은 어쩐지 불편해지고 있었다.     


지원이와 병관이네는 한 달에 한 번 아빠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집에서 피자를 시켜먹는다. 신나게 식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빠  “저녁 약속이 취소됐어요. 밥 있어요?”

엄마  “우리 피자 먹는데, 같이 드실래요?” 엄마가 묻자 아빠는 고개를 저으십니다.

엄마  “찬밥 있는 데 김치볶음밥 할까요?”

아빠  “먹던 거 계속 먹어요. 내가 할게요.” 아빠는 김치볶음밥을 해 드십니다.

 -고대영, <먹는 이야기> 중-       


엄마는 오늘도 마트로 향한다. 반찬을 걱정하며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본다. 이번에는 편식하는 지원이 때문에 고민이다. 퇴근하는 아빠가 다시 등장하고 첫마디는 역시 밥이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저녁은 뭘 먹어요?”

아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녁 식단부터 묻습니다.

엄마  “네, 곧 차릴게요. 손부터 씻으세요.”     

-고대영, <먹는 이야기> 중-


설거지를 끝낸 엄마는 아빠와 차를 마신다. 지원이가 채소를 싫어하고 살이 찌는 음식만 먹으려고 해서 걱정을 하고 있다. 아빠는 “그러니까 야채를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해 줘야지.”라며 핀잔을 하니 엄마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마치 육아는 엄마의 몫, 아이들의 습관은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처럼 보인다.

아빠는 딸아이를 위해 나름 방법을 찾으려고 검색을 한다. 그중 새로운 대안으로 ‘텃밭 가꾸기’를 떠올렸으나 휴일에 제대로 못 쉴 것 같아 결정하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한다.           



지원이  “엄마! 점심 뭐 먹어요?”

엄마  “응, 스파게티.”

병관이  “나는 자장면 먹고 싶은데!”

아빠  “나도 스파게티는 별로인데.”

엄마  “한 가지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이것저것 어떻게 해요?”

엄마가 큰 소리를 치자 아빠와 병관이는 아무 말도 못 합니다.      

-고대영, <먹는 이야기> 중-


노는 주말, 병관이는 엄마가 차려주는 점심 메뉴에 불만이다. 아빠 역시 음식 타령으로 엄마의 속을 긁는다.

아침에는 전날 먹었던 된장찌개가 식탁에 오르자 아빠는 “또 된장찌개야? 한 번에 먹을 만큼만 만들지.”라며 엄마를 타박한다. 마음 상한 엄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남은 걸 어떡하고 매번 새 반찬을 만들어요!” 그리고는 다시 갑분싸!

이런 상황들이 펼쳐지고 어떻게 되었을까. 아빠는 미안해서 설거지를 한다거나, 눈치 보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거나 하는 행동으로 해결한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본 병관이가 설거지하는 아빠 옆에서 깐족거리는 표정을 짓는다. 아빠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이 액션은 가사의 짐을 짊어진 한 사람으로부터 분리되고 있었다. 책을 읽어주다가 나도 모르게 둘째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살폈다. 나는 책을 조금 빨리 덮었다.      

    

‘엄마의 자리’가 너무나 견고해서 아무도 건너오려 하지 않는다. 엄마가 고충을 드러내면 기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전부다. 가족 구성원인 아이들도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던지 부모를 도우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이 가정에서 생계는 책임지지만 그 외 함께 분담해야 할 일들에 뒤로 물러서 있는 모습이 아쉬웠다. 가부장적인 부모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자연스러울지 모르나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그림책이기 때문에 마냥 가볍지가 않다.     


첫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 나는 지원이와 병관이네 이야기에 공감했다. 밥때를 고민하며 마트를 간다거나 집안일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이들을 키우는 여느 집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용돈, 거짓말, 친구와의 갈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 우리 아이도 겪을 문제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실생활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것에 대한 공감이었다. 더도 말고 딱 거기에 멈춰있다.     


「먹는 이야기」는 2011년에 나온 책이다. 거의 10년 전이다. 그 무렵 집 안 분위기는 대부분 지원이와 병관이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인지가 낮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빠가 설거지를 한다거나 아이들과 놀아준다거나 고기를 굽는 모습은 엄마를 ‘잘 도와주는’ 자상한 모습으로 비치던 때였다.      


고대영 작가는 2006년 「지하철을 타고서」를 첫 작품으로 많은 관심과 인기로 꾸준히 시리즈를 출간했다. 현재까지도 어린이책 작품 활동과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원이와 병관이는 작가의 실제 아이들이며 실명을 그대로 썼다. 그 당시 유치원생, 초등생이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으니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 그만큼 작가도 시대를 건너 지금 여기 새롭게 발 딛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의 시선과 지금의 시선에 많은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몇 년 사이 성평등에 대한 의식과 젠더 감수성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불과 5~6년 전까지 쏟아졌던 생활 그림책에는 고정된 시선이 담긴 책들이 엄청 많다. 학교의 교과서도 개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 집 책장에도 아이가 클 때까지 소장하고 싶은 그림책을 추린다면 솔직히 몇 권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란다. 그전에 어른은 더 민감하게 자라나야 함을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다.     


W.살롱

-에디터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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