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아, 너는 누구냐?

by 박재석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죽음아, 너는 무엇이냐? 왜 이 땅에 태어났니? 한 동화작가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삶을 더욱 사랑하게 하려고 내가 태어났지." 참 근사합니다. 희망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뭔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도 있습니다. 어딘가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 답을 누군가 나에게 알려 주려는 것같은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2018년 12월 13일,

지난 하룻밤 사이 세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함께 애도하면서 제 마음속에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정말 이 세상이 얼마나 슬픈 곳인지 말해 주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죽음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잔인하며 인정사정없이 약한 것들을 휩쓸어 가는 괴물인지 알려주는 본말과 같은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슬프고 부조리한 세상을 건너갈 다리가 되는 희망을 만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병원 당직 날 있었데요, 밤 열 시쯤 전화가 왔습니다. 뇌 수술을 받은 환자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그만두고 환자를 보내드리려 하니 와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환자가 누운 침대를 둘러싸고 남편과 딸 부부, 아들이 섰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내가 뭔가 해 주기를 기다고 있습니다. 전례대로 환자의 인생과 추억들이 있으면 나눠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딸부터 눈물을 훔치며 "정말 엄마는 따뜻하고 친절하고 좋은 분이셨어요"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곁에 있던 남편도 입을 엽니다. "그래요 정말 나와 46년 사는 동안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봤습니다. 가끔 제가 속을 썩일 때는 마녀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이야기 도중 웃음이 빠지지 않습니다. 환자와 나눈 기억들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의 슬픔이 상처로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놓고 눈물 흘리고 웃어 준 가족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46년간 함께 한 아내를 보내는 남편은 분명히 울고 있었지만, 또 함께 웃었습니다. 슬픔을 은근슬쩍 넘기거나 회피하기보다 그대로 직면하며 함께 울고 그리고 그 비워진 공간에 기쁨이 자리하는 것 같아 신기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삽관을 뺀 뒤 환자는 곧 숨을 거뒀습니다. 슬프지만, 그 슬픔을 통해 평안과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새벽 1시쯤, 다시 삐삐가 울렸습니다. 11살 된 소녀와 4살 될 남동생을 병원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와서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파악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엄마와 자동차로 여행하던 두 남매가 엄마가 몰던 차에서 사고를 당하고, 엄마는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습니다. 의료진들은 소녀를 배려해 나머지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엄마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밤을 보내면 아빠와 다른 친척들이 올 것이고 그때 알려도 늦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저도 이런 지침에 동의하고 병실에 들어가서 아이를 만났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가 어떤 상황인지 걱정된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나도 방금 와서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졸린 눈이었지만, 놀란 가슴과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11살 소녀의 눈을 쳐다보는데,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 앞에서 저도 속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아! 내일 아침 이 아이가 맞이하게 될 현실은 너무도 혹독하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는 소녀는 내가 내민 막대사탕을 받아 들고 자신의 가방 속에 캔디가 더 많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꼭 기억하라는 내 기도에 '아멘'으로 답했습니다. 그녀는 그 밤에 시 관할 청소년 쉼터로 옮겨갔습니다. 이 세상이 그녀를 삼키지 않도록 남아 있는 가족들과 어른들이 잘 지켜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밤새 고생한 간호사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막대사탕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 11살 소녀의 담당 간호사에게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더니, 되려 이렇게 자신의 일을 인정해 주고 고마워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기름을 바르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11살 소녀가 직면한 부조리하고 잔인한 현실은 잠시나마 의료진과 아동보호사 등에 의해 잠시나마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엄마 없는 혹독한 세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곁에는 아빠와 다른 어른들이 바람막이가 되어 줄 것을 믿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와 아내가 보낸 카톡을 봤습니다. 미국 블루밍 턴 한인교회의 한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입니다. 지난주에 쓰러지셨는데 며칠 전 의식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기도해 드리려고 했는데 번번이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저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를 주신 분이라서 마음이 더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시는가' 연세는 높으시지만 이렇게 인사도 없이 보내 드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 자신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습니다.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 '그저 은혜만 받고 보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 아내는, 내 자녀는, 내 부모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게 된다면 이것보다 허무하고 슬픈 일이 또 있나!' 가족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내가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환대하는데 얼마나 인색해졌는가?


나 자신을 위해, 내 아내를 위해, 내 아이들을 위해 나는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동 가운데 나와 내 가족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교회 어르신의 소천 소식은 내게 가장 중요하지만, 내 삶 속에서 그렇게 무뎌지고 '항상 곁에 있겠지' 하는 생각 속에 갇혀 버린 나와 내 가족 내 부모의 소중함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어르신, 그때 해주신 말씀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누가 있어서 어르신의 고통을 알겠습니까? 어르신이 제일 그 고통 잘 아십니다. 편히 쉬세요"



그 동화작가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 생각엔 중요한 퍼즐 하나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 삶을 더욱더 사랑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삶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슬픈 곳인지, 얼마나 부조리와 허무로 가득 찬 곳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슬픔과 허무와 부조리 속에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과 그 이웃들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이유로 죽어갑니다. 죽지 않아도 될 목숨들이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누구의 탓일 수도 있고, 누구의 실수 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궁극적으로 세상은 슬프고 부조리하고 허무한 곳입니다. 이 현실을 알아야만 죽음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명확해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 방향을 어렴풋이라도 알게 됩니다. 바로 일상 속에서 나와 타인을 위해 사랑과 환대를 끊임없이 베푸는 일, 이것만이 죽음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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