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와 수용이빚어낸공감
제가 생각하기에 대인관계 그룹의 핵심 조건은 바로 무조건적인 수용과 지지에 있습니다. 제가 3개월 넘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영어가 짧고 생각이 단순해서 혹시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 안에 항상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저의 선입견을 현실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이 강하면 강해 질수록 저는 더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누적된 화가 폭발했고, 그로 말미암아 제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 폭발적이어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파편을 맞아 상처를 입게 됐다는 것이죠. 이후에 나의 내면, 그리고 나를 있게 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이론적인 틀에 따라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 자신을 말로서 더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을 조금씩 익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고통과 현실적인 관계의 문제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가족과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충격적인 경험이나 더 이상 기억하기 싫은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하고 나누었을 때, 그룹에 있는 동료들이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해 주고 격려해 주었을 때, 마치 내 안의 상처가 아물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관계가 소원했던 두 목사님들의 가족사와 생활사에 관한 고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행동과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근무 시간 정할 때 정말 자기 말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 같아 저를 화나게 했었던 한 흑인 목사님은 어린 시절 친척 오빠부터 말할 수 없는 성적 학대를 받은 경험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 때문에 결혼 생활도 순탄치 못했고 목회자가 된 뒤에도 사실 남자들을 잘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전 남편으로부터 얻은 딸을 키우며 가정을 혼자 꾸려야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생존의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주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신이 여기까지 와 있지만, 하루하루의 삶은 그야말로 투쟁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또, 저와 갈등이 있었던 다른 백인 여자 목사님도 남편이 암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숨졌고, 그 이후로 두 자녀를 키우며 생활하고 있는데,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야구팀 코치였던 남편 덕에 신학교에서 돈 걱정하지 않고 공부를 마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자 막막한 상황에 생활고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워낙 가부장적이고 리더십이 강했던 남편 때문에 자신은 솔직히 운전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겨우 채플린 레지던트 자리를 얻어 박봉에도 사역의 꿈을 버리지 않고 지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개인의 고통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공감이라는 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나의 고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병원 채플린으로서 나의 고통은 더 이상 부끄럽거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고통이 바로 남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 채플린은 바로 이런 고통을 지닌 채 혼자 신음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과 소통하며 그 고통을 통해 고통과 씨름하는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그야말로 특권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부 여행을 마칠 시간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미국 병원 채플린에 대해 여러 분의 머릿속 개념의 방에 어떤 그림이 어렴풋하게라도 그려지시나요? 아니라도 걱정 마세요! 여러분들의 책임이 아니라 저의 책임이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1부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저 나름대로 병원 채플린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림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병원 채플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목사 하면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목에 얹고 다른 양 떼들과 함께 걸어가는 목가적인 풍경을 많이 떠 올립니다. 저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의 한 명으로 불리는 독일 학자 칼 바르트 선생의 말을 인용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칼 바르트 선생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과 등을 지고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경종을 울리는 말을 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 또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이 말처럼 병원 채플린은 어쩌면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심리학이라는 과학책을 든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경전도 존중하고, 동시에 심리학, 사회학, 가족 이론 등 과학이 지금까지 밝혀 낸 인간관계의 많은 이론들을 두루 섭렵하여 사람을 살리는 병원의 사명에 봉사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목회적 지혜를 가지고 학제간협력팀 interdisciplinary Team의 일원으로서 병원의 사명인 생명을 살리고 삶을 개선시켜 나가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전문직업인입니다.
이제 좀 더 실질적인 병원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부에서는 제가 만난 환자, 환자 가족, 병원 스태프들과 함께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때때로, 마주하기 힘든 장면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잠시 책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 부분은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항상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제가 함께한 고통을 통해 배움을 얻었고, 그 배움을 함께 나눌 소명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계속 함께 동행해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