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은숙
40 초반에 찾아온 뇌졸중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기억을 잃었고 말을 잃었고 좋아하던 일을 잃었다. 그렇다고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발병은 불편하고 소원해져 가던 관계가 전환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대로 살았더라면 끝을 봤을지도 모를 남편과는 퇴원 후 온종일 붙어 다녔다.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고 어눌한 말로는 소통이 어려우니 남편이 비서처럼 꼭 붙어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던 것이다. 집안일이며 간호하는 일, 모두가 처음인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데도 인색하던 철학자에게 얼마 후 칭찬의 말상자를 가지고 천사가 찾아왔다. 작고 하얀 그 아이는 아빠가 보내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아이의 옹알이, 성장하는 매 순간이 신비로웠다. 무엇보다 그 모든 장면이 철학자의 재활 상황과 겹쳐져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올 때마다 아이는 새로 알게 된 낱말을 가지고서 연신 종알거린다. 가만히 들어보면 단어가 문장에 꼭 맞지도 않지만 그런대로 뜻이 전달되니 철학자에게는 더욱 친근하다. 여느 어른과 달리 철학자는 틀린 것을 고치는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을 칭찬하며 아이와 함께 낱말놀이를 한다. 엄마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그 자리에서 정정해줘야 하는 강박이 철학자에게도 탑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절이 떠오르면 피식 실없는 웃음을 짓게 된다. 아이는 할머니의 웃음에 잠깐 놀이를 멈추지만 이내 진지하게 우스꽝스러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단어와 사물, 소리와 활자를 더디게 연결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은 아이의 시간보다 조금 앞서 있어 다행이다 싶다. 조만간 아이는 놀이에 흥미를 잃고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홀로 글자들을 다룰 것이다. 아이의 언어는 빠르게 성장하는데 철학자의 시간은 더디기만 하니 때때로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럴 때면 침대에 누워 발끝에 걸린 그림을 본다. 불편한 오른손으로 그린 첫 펜화는 철학자의 시간을 찬찬히 살피게 하고 그림의 마법은 그만의 리듬을 되찾아준다. 유창하게 말과 글을 쏟아냈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게 단어의 깊이를, 말의 힘을 생각하진 않았다. 때로는 그 말이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눌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한 아이와의 말놀이는 철학자의 지나간 과오를 정화하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철학자의 시간이 담긴 액자 아래엔 아이가 그려둔 크레파스화가 비뚤게 붙어있다. 할아버지 어깨 위로 목말을 타고서 신나게 웃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아빠의 목말을 타고 창가에 입김을 불어대며 글자를 쓰고 지우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의 글자들은 주로 이름이었고 그 이름들을 나만의 기호로 줄여 부르던 비밀스러운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축약된 철학자의 이름에는 아빠의 이름이 새겨 있다.
ㅇㄱㄴㅅ/ㅇㄴㅅㄱ
*프랑스 사람들은 뇌졸중을 AVC(accident vasculaire cérébral)라 줄여 부른다. 철학자의 모든 것들이 축약된 철자의 소리처럼 <아베세>로 되돌아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