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5
'부모는 주는 사람'이라는 명제는 아빠가 늘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엄마와 아빠는 날 사랑한다고 머릿속으로 받아들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엄마와 나란히 누워 있으면 예뻐 죽겠다며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조카를 껴안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우리 리리는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지~"하고 있을 때 이게 엄마가 나에게 했던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시기 몇 달 전, 가족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굣길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외사촌 언니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집에 와서 울고 있었다. 12살이니 스스로 돈을 챙겨 병원에 가야겠다는 대처 방법이 없을 때였다. 장을 보고 온 엄마가 깜짝 놀라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링거를 맞았다. 엄마는 내 옆에서 "내가 대신 아팠으면..."이라고 했다. 그건 진짜였다. 엄마의 말과 마음이 진짜였고, 나는 내가 아파서라도 엄마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엄마는 집을 나갔지만 난 아파서 누워 있을 때를 종종 생각하며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고 생각했다. 엄마가 없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샤워를 했고, (그 이전엔 머리도 잘 안 감았다) 일기장엔 거짓말을 썼다. '엄마는 잠깐 미국에 가셨다.'
아줌마랑 살기 전에 아빠는 잠깐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시골의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 미혼인 상태였고 자식도 없었다. 13살의 난 엄마의 자리가 '채워진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그 사람을 잘 따랐다. 아빠는 집안의 온갖 금붙이, 시계 등을 그 여자에게 주었고 얼마 안 되어서는 더 이상 그 여자분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 새끼들이 먼저지. 내가 자식들한테 잘해주려고 하면 (그 여자가) 자꾸 질투하잖아."
아빠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난 다시 철석같이 믿었다. 아빠는 여자보다 우리(오빠와 나)가 먼저구나. 아빠는 우리를 사랑하는구나.
그런데 난 자주 죽고 싶었다. 아줌마가 청소만 도와주겠다며 우리 집을 들락날락거리더니 어느 날부터 아빠 방에서 문 잠그고 나오지 않았을 때, 아줌마랑 살기 싫다고 말하자 아빠가 날 내쫓았을 때, 명절 시골 할머니 집에 갑자기 아줌마가 나타났을 때, 아줌마가 여기 왜 오시냐고 하자 아버지가 '친척들 앞에서 자기를 수치스럽게 했다며' 우리를 내쫓았을 때, 엄마가 아줌마랑 아빠를 헤어지게 하라며 밤낮없이 연락했을 때마다 죽고 싶었다. 내가 죽는 게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리란 걸 알았다. 복수처럼 죽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원하는 대로) 혼자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주 죽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명명되지 않은(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공허함, 외로움, 결핍감이 들었다. 계속 뭔가를 먹었다. 먹고, 또 먹고, 위가 아프고 찢어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먹었다. 다행히(?) 토할 정도의 폭식장애는 아니었지만 늘 허기진 느낌이었다. 자해를 하진 않았지만 목매다는 상상을 자주 했다.
상담 선생님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호소문제는 '외롭다'였다. 호소문제란 내담자가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해결하고 싶은 문제다. 나는 외로움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외로움은 넓은 공간을 빼곡히 채운 거대한 책장 같아서 갑자기 지진 같은 게 일어나면 내가 압사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상담을 한 번 종결하고도 때때로 상담을 받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호소문제는 늘 같았다. 너무 외로워요.
이번 제주 여행을 끝내고 와서도 다시 상담이 받고 싶어졌다. 나는 다시금 외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돈을 벌고 있었고, 80회기가 넘는 교육 분석을 통해 자기 이해도 넓어졌고, 상담심리사 1급을 따서 수퍼바이저 자격도 취득했는데도 말이다. 매일 아침 달리며 10kg가량을 감량했고, 저녁에는 한국무용을 배우고, 주말에는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는 평화로운 삶인데도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 울고 싶었다.
아빠는 본인이 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난 왜 이렇게 결핍감이 느껴지는 걸까. 주는 사람을 만나고 왔다면 나는 채워져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 아빠가 주는 사람인 건 확실했다. 돈을 주었고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결핍감도 준 게 아닐까. 먹으면 먹을수록 목마른 소금물 같은 걸 준 게 아닐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카린 같은 걸 준 걸까. 확실히 아빠는 주는 사람이었다.
여행 때 아빠의 이상한 모습을 볼 때마다 - 가령 숙소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못 잡게 하겠다며 '닫힘' 버튼을 꾹 누른 채 이러한 태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아도취적인 모습, '너네는 나를 무시하지만 박사장(본인이 아는 부자)만이 나를 유일하게 인정해준다'는 말 -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생각했다. 가여운 사람이라고 거리를 뒀다. 너무 힘들게 살아서 이상해진 아저씨로 두었다. 나를 유일하게 거둬주고(?), 돈과 사랑을 줬던 사람을 나와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했다.
그래서 외로워진 게 아닐까. 서울로 돌아와서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나를 부양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회사에 가면 동료가 없었다. 동료 없이 일하는 사무실은 편하긴 했지만 공허할 때도 있었다. 집에서든, 일하면서든 혼자 밥을 먹은 지 3년이 되어갔다. 내담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내 마음을 털어놓는 대상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거리를 두자 정말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상담 선생님이라도 앞에 두고 얘기하거나 울고 싶었다.
"주는 게 어른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부양하는 사람이면 어른이에요."
어른이 되기 싫다고 말할 때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이미 어른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부양받지 않아도 되지만, 누군가를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스스로 나를 돌볼 수 있으면 어른이었다. 그래, 혼자면 뭐 어때,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날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글로 표현하며 정리하고 침잠할 때까지 기다릴 순 있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의식되지 않을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Image: Photo by Thomas Re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