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6
아빠와 아줌마를 제주 공항에서 만나 처음으로 간 관광지는 만장굴이었다. 대학생이었던 아빠가 제주로 여행을 왔을 때 와 본 곳이라고 했다. 난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 재밌을 것 같았다. 40년 전에 제주도가 어땠는지에 대한 설명은 추상적이고 빈약했다. 구체적으로 와닿은 에피소드라고는 밤이 깊은 한라산에서 길을 잃었던 거랑 감귤 하나 따 먹고 주인에게 혼쭐이 났던 경험이었다. 아빠에게 강렬한 감정(?)을 남긴 경험이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나 보다. 만장굴은 왔다고 말하긴 했지만 생생한 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빠는 "여길 다시 오다니!" 하며 감개무량해했다. 만 65세가 넘은 아빠와 아줌마는 경로우대를 받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새삼 우리 아빠가 이렇게 나이가 드셨구나, 이상한 마음이었다. '그래, 더 잘해드려야지. 아빠는 이제 경로우대를 받는 나이야.'라며 심기일전하며 만장굴에 들어갔는데 얼마 못 가서 아줌마가 대(大) 자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나도 너무 놀란 데다가 크게 다쳤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심하게 다치진 않으셨다. 놀란 아빠가 떨어뜨린 안경을 주워드리며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는데, 그다음엔 아빠가 계단을 못 보고 넘어질 뻔했다.
두 분은 서로 손을 꼭 잡고 만장굴 안을 걸어 다녔는데, 그게 얼마나 눈꼴시던지 '안 본 눈 삽니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나는 손 잡아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바닥을 보며 최대한 조심히 걸었다. 아주 천생연분 납셨네, 납셨어, 속으로 꿍얼거렸다. 아줌마가 못내 좋아하는 표정이 보여서 더 얄미웠다. 아까 넘어진 게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쁜 사람일까? 엄마와 아빠를, 그리고 아줌마를 증오하고 미워했다. 친구들이 마음 좋게 얘기하는 것도 때때로 가시 돋치게 들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못되어먹은 인간인가, 하는 불안감과 혐오감이 들었다. 오랫동안 나 자신을 책하고 벌하기도 했다. 부모를 미워한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미워한다면,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나에게 '아빠와 아줌마를 헤어지게 하라.'라고 명령(?)할 때, 나는 내 몸에 엄마의 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역겨워서 온몸의 피를 빼고 싶었다.
부모를 미워할수록 나 자신을 미워했고, 나를 미워할수록 남에게는 더 착한 사람처럼 굴었다. 어쩌면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좋은 사람의 위치에 앉아있는 상담사가 된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을 해주었다. 훈련을 받으면서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모습조차 뜯어고쳐야 진짜 상담을 할 수 있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느껴지는 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기는 했다. 내담자에게도 화가 나면 숨기지 않고 화를 냈다. (화를 내면 돌아설 줄 알았던 사람들도 오히려 진정성을 느끼고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성격장애의 면모가 있으니까 나 또한 그대로 닮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사실은 나 역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기준 중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B군 성격장애'에 속하는데, B군의 진단기준들의 몇 개는 나랑 똑같았다. '자기 이미지 또는 자신에 대한 느낌의 현저하고 지속적인 불안정성'-(청소년기에 누구나 겪는 정체성 문제였다), '자신을 손상할 가능성이 있는 최소한 2가지 이상의 경우에서의 충동성', '다른 사람을 자주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는 믿음'-(누구나 하는 정도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진단명 내의 기준들 내에서 일정 개수를 충족하고 맥락적으로 들어맞을 때 진단을 내릴 수 있는데, 오히려 특정 장애보다 'B군'이라는 더 넓은 범주 안에 나를 포함시키며 결함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도 그럴 것이 21살 때 병원에서 종합심리평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자기애적 특질'이 보인다고 했었다.
"저도 성격장애일까요."
"그런 특성이 있긴 하지만 장애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경미 씨는 자기애적이라기보다는 따지자면 오히려 경계선 쪽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해요.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게 있잖아요. 그렇지만 장애까지는 아니지. 근데 뭐가 두려운 거예요?"
"아빠랑 똑같을까 봐요. 저도 제가 그런 모습이면 어떡하죠?"
"경미 씨는 스스로를 너무 모른다. 지금 나랑 대화가 잘 되잖아요. 성격장애면 어떻게 이렇게 진솔하게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겠어요? 경미 씨는 아빠와 다른 사람이에요."
'다르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내가 아빠랑 똑같은 사람이 될까 봐 너무 두려워 가끔은 이런 걸 검색해봤다. '부모는 친일파지만 자식은 독립투사인 사람' ... 정말로 실례가 몇몇 있었고, 자식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구나 안심이 되었다. 지금 보니 좀 극단적인 것 같긴 하지만 난 정말로 부모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아빠와 내가 닮은 데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사고하고 행동하는 양식이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일단 음식을 잘 남기지 않는다. 음식을 남기는 건 죄악에 가까울 정도로, 뷔페에 간다면 먹을 만큼 가져오고, 가져온 것은 다 먹는다. 친구들과 밥 먹을 때도 남기는 게 싫어서 웬만하면 끝까지 먹는 편이다. 아빠의 식습관을 그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여행 오면서 저울 가져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엇, 나도 저울 가져왔는데?"
내가 가져온 건 캐리어 무게를 잴 수 있는 핸디 저울이었고 아빠가 가져온 건 체중계였다. 정말 체중계 짊어지고 여행 오는 사람은 처음 보긴 했다. 어플에서 매일 체중을 재면 현금으로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주는 것 때문이었다. 이렇게 집념 있고 성실한 점은 좀 닮은 것 같다. 나 역시 매일 출석체크를 하면 포인트를 주는 앱테크 활동을 몇 년째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곳에 가거나 안 먹어본 걸 먹어보는 것도 좋아했다. 극단적인 면모도 꽤 닮았다. 아빠는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다시는 안 본다.', '다시는 안 간다.'는 식의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 나도 가끔은 별 것 아닌 거에 기분이 상해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다시는 안 봐야지...' 하며 생각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자식이니까 닮은 건 어쩔 수 없다. 조카가 태어나고 보니 아빠-오빠-조카의 얼굴형도 닮았고, 광대가 튀어나온 정도도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 나도 의식하진 못했지만 아빠와 닮은 점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기분이 상하면 혼자 '다시는 안 본다'며 결정하지 않고 어떤 게 기분이 나빴는지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는 가끔 '그 사람이 자기에게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겠다는 단서를 붙이기도 했는데, 그런 거만한 자세는 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도 있다.
또 친척들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배우자와 상의 없이 돈을 퍼주거나, 배우자를 면박 주지도 않을 것이다. 배우자에게 영부인급(대통령급)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고 나의 보통의 삶을 책임지며 살 것이다. 애정을 철회하는 형태로 자식을 조종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정보나 관점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유념할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 또한 나를 무시한다고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있는 그대로 표현할 것이다.
Image: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