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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세 Jan 23. 2023

불란서도 식후경: Maison Lameloise

작은 시골 마을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지난 번 매듭지었던 글과는 다르게, 아주 산뜻하고 직관적이고 구미가 당기는 글을 써보아야겠다. 그렇다면 역시 음식 얘기가 제일이겠지!


지난 가을, 프랑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시국 이후 약 3년 만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이 간절했던지라 기회만 주어지면 어디든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 마음은 올곧게 프랑스만을 향하고 있었다. 바쁜 일정 중 겨우 짬을 낸 거라 관광의 압박 없이 그저 잘 쉬다 오고 싶었던 나에게, 제법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파리는 정답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데 파리에만 있기는 아쉬운데? 짧게 다른 지역도 둘러보고 싶었으나 단번에 후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고 이거다 싶었다. 그래, 부르고뉴를 가자!

파리에서 제법 가까운 부르고뉴는 와인 그리고 각종 미식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프랑스 요리하면 흔히 떠올리는 뵈프 부르기뇽, 꼬꼬뱅, 에스카르고 등이 이 지역의 대표 음식이다. 가을날 금빛으로 무르익은 포도밭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와이너리에 가서 좋은 와인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맛보면 되겠다. 머스타드로도 유명한 거점 디종(Dijon)과 그보다 작지만 와이너리로 유명한 동네 본(Beaune)을 다녀와야지- 맘먹고 이것저것 찾던 중 흥미로운 정보가 눈에 띄었다. 본에서도 남쪽으로 더 가야 나오는 작은 샤니(Chagny)라는 마을에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 이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이 동네까지 오겠어? 호기심과 입맛이 함께 당긴 나는 곧장 예약을 하였다. 




본에서 짧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체크아웃을 한 뒤 곧장 차를 끌고 목적지인 <Maison Lameloise>로 향했다. 식당까지는 차로 약 20분 거리인데, 커다란 가로수로 이루어진 시골길은 너무 산뜻해서 그 자체로 입맛을 돋우는 하나의 전채요리 같았다. 식당에 다다르니 건물 앞은 이미 차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일단 건물 옆에 적당히 차를 대고 식당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리셉션의 따뜻한 환대가 이어졌다.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냐며 나의 상태를 살뜰히 챙기고, 내가 주차한 곳이 괜찮은지를 묻자 자신이 직접 봐주겠다며 곧장 확인에 나섰다. 그 사이 또 다른 노련한 서버가 나를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식전주(Apéritif)를 주문하였다. 가볍게 마실 샴페인을 추천해 달라 했더니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나온 Bollinger Rosé brut을 주셨다. 너무 달거나 텁텁하지 않고 맛있어서 식전주로도, 전체 코스에 걸쳐 곁들이기에도 좋았다.




이어서 웰컴 푸드 느낌으로 나온 아뮤즈 부슈(Amuse bouche, 한 입 크기의 작은 전채요리). 버터, 코코넛, 향신료를 베이스로 하고 으깬 아몬드를 속에 넣은 롤리팝이었다. 각종 향신료가 들어가 향이 묘한데 맛이 좋았고, 보이는 것과 달리 디테일한 식감이 인상적이었다.


입맛을 돋웠다면 메뉴를 받아들고 주문할 시간. 코스의 기본은 Menu Instant(189유로)이고, 여기에서 메인/디저트 등의 옵션을 바꾸고 싶다면 Menu Dégustation(220유로)을 선택하면 된다. 여기에 관자 요리를 더하고 싶다면 40유로, 치즈 디쉬를 더하고 싶다면 20유로를 각각 추가하면 된다. 코스와 같은 스타터에 조금 더 간단한 구성으로 된 Lunch Menu(95유로)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나는 메인과 디저트 모두 더 궁금한 옵션이 있어 Menu Dégustation을 주문하였다.




가장 먼저 나온 코스의 아뮤즈 부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맨 오른쪽 피스였는데, 크런치한 겉면 안에 허브 크림이 채워져 있고 윗면에는 이 지역에서 만든 소시지(saucisson)와 허브가 얹어져 있었다. 허브 크림의 향이 자연스럽고 느끼하지 않아 좋았다. 맨 왼쪽 것은 홍합, 가운데는 새우 베이스였는데 음식 소개를 불어로 들어서 디테일을 까먹었다(...) 다만 모두 로컬 기반의 재료를 많이 활용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두 번째 아뮤즈 부슈로는 베이컨과 양파로 속을 채운 튀김이 나왔다. 이건 아는 맛인데 너무 맛있었다. 튀김인데 어쩜 이렇게 하나도 느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특히 함께 곁들여준 크림이 킥이었다. 너무 맛이 좋아 서버 분께 재료에 대해 다시 여쭸더니, 버섯과 블랙베리(mûres)를 섞어 만든 크렘 앙글레즈(crème anglaise, 프랑스 요리에 많이 쓰이는 커스터드의 일종)라고 대답해 주셨다. 베리류가 들어가서인지 와인 기반의 부르기뇽 소스도 연상되는 훌륭한 맛이었다. 


 


드디어 앙트레(Entrée). 카라멜라이즈드한 양파를 베이스로 한 국물에 버섯과 채소 등을 자작하게 졸이고, 그 위에 크리미하게 녹인 콩테 치즈와 개구리 다리 튀김을 얹은 수프가 나왔다. 개구리 다리라니... 개구리 다리라뇨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개구리인 인간으로서 메뉴를 볼 때부터 진땀났던 순서가 다가왔다. 그치만 이왕 눈 앞에 닥친 건 다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눈 딱 감고 먹어버린 개구리 다리 튀김은 의외로 별 다른 생각이 안 나게 부드럽고 먹을 만했다. (허나 뼈를 골라내야 하는 순간은 정말 섬칫했다 으악!) 튀김보다는 버섯과 양파로 맛을 낸 국물이 더 좋았는데, 앞 순서에도 버섯과 버터를 기본 재료로 쓴 요리가 여럿 있었지만 각 요리마다 버섯과 버터의 풍미가 아예 달랐던 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전 요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물리지 않고 매번 새로웠다. 




이어서 브리오슈 모양의 크루아상(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는 크루아상이었다), 캉파뉴와 수제버터가 나오고,




첫 번째 생선요리(Poissons) 등장! Char라고 하는, 연어와 송어의 중간 쯤 되는 민물고기가 주재료인 요리였다. 저민 생선살을 밀푀유처럼 겹겹이 쌓은 뒤, 짭짤한 우유 거품으로 겉을 감쌌다. 생선살의 맛과 질감이 버섯이나 햄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신기했고, 풍부한 우유 거품과 어우러져 식감이 재미있게 연출되었다. 롤 모양으로 만든 샐러리와 그 위에 얹어진 캐비어보다는 요리 주변에 곁들여진 버섯(chanterelle)과 허브 크림이 더 맛있었다. 이쯤 되어선 '이곳은 크림 맛집이 확실합니데이!'를 속으로 오십 번쯤 외치고 있었다...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요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뒤이어 나온 두 번째 생선 요리는 붉은 숭어(Red mullet). 고기를 수비드하듯이, 방아잎 등을 활용한 채수에 생선을 담가 조리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그물버섯 튀김(Porcini mushroom), 훈제한 정어리, 포도, 생선 뼈를 활용한 소스가 곁들여졌다. 소스나 가니쉬는 좋았는데, 너무 미끄덩한 숭어의 식감과 정어리 특유의 향은 썩 편하지 않아 조금 남기고 말았다.




고기 메인 요리를 기다리며, 식사 내내 얌전했던 멍뭉이 구경. 동물 친화적인 식당과 고객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드디어 나온 메인 고기요리(Viandes)는 바로 사슴 요리. 나무로 피운 불에 구운 사슴 안심 부위(filet)에, 호박을 활용한 플랜(flan)과 구운 채소, 엘더베리와 전나무 잎을 활용한 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다.

앞 순서까지도 훌륭하다 생각했는데 이 요리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잘 구워진 고기를 잘라 베리 소스, 단호박 퓌레를 얹어 한 입 먹자마자...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이 과장으로 점철된 작품이 아님을 즉시 깨닫게 된다 (정말로!). 경이로운 요리를 맛본 만화 속 주인공들의 눈 앞에 섬광이 지나고 뇌리에 온갖 공간과 장식이 스치듯이, 나는 이 요리를 맛보자마자 어느 가을 숲 한복판에 놓이는 기분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 시각적인 심상이 이토록 강렬하게 펼쳐지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해 헛웃음이 났다. 요리를 통해 이토록 진하게 계절감을 체험할 수 있구나. 메뉴판 가장 윗쪽에 적힌 'fall season'이 유명무실한 것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아름다우니까 풀샷으로 한 번 더 볼테야...




사실 메인이 서빙되기 전, 다른 고기 요리로 잘못 나오는 실수가 있었다.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대강 넘기기도 어렵고, 사슴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해당 코스를 주문했던 거라 서버 분께 바로 말씀드렸다. 서버는 사과와 함께 내 요청을 바로 처리해 주시곤,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에도 거듭 양해를 구하며 나의 컨디션을 살폈다. 그리고 메인이 제공될 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위의 메뉴를 서비스로 함께 주셨다. 부르기뇽 스타일로 조리된 사슴 어깨고기 위에 매쉬드 포테이토가 얹어진 간단한 요리였는데, 꼭 깊숙이 떠서 다같이 먹으라고 알려 주셨다. 가정식에 가까운 따뜻한 맛이었다. 많이 기다리지도 않았거니와, 한 나절을 기다려도 그 보람이 있을 법한 메인 요리였는데, 살뜰한 서비스까지 받아 흡족하였다. 



 

배가 불러 치즈는 건너뛰고 곧장 디저트 순서로. 사과로 만든 펀치로 입가심을 한 뒤, 한 입 사이즈의 디저트들(mignardise)을 맛 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메인 디저트. 최애 과일이 무화과인 무화과 인간이 무화과 디저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라타피아(Ratafia)라는 달콤한 리큐어에 졸이듯이 구운 무화과를 중심으로 무화과 잎으로 만든 소르베, 오렌지꽃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무화과가 주변에 둘러져 있다. 가장 아래에는 벌집 모양의 얇은 생강쿠키를 깔아 식감을 더했다. 가을을 연상시키는 컬러 팔레트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손대기 아쉽게 예쁜 디저트였다. 하지만 물론 뚝딱 해치웠다.


디저트_최최최종.png : 오렌지향과 향신료가 곁들여진 초콜릿 케이크 또한 무척 좋았다.




끝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모든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평일 점심에 혼자 식당을 찾은 아시안이 재료나 요리법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식사를 하니, 서버 분께서 내게 호기심이 인 모양이었다. '혹시 프랑스에서 일하는 요리사예요?'라고 묻길래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물꼬를 트자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는 일이 뭐예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아, 저는 한국에서 PD로 일하고 있고, 지금은 휴가 중인데요, 예전에 채식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며 좋은 셰프님들과 작업한 이후로 다이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멋지네요. 좋은 식사였기를 바란다고 답하는 서버의 목소리에는 자긍심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사진도 찍어 주셨다.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찐행복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려는데, 어느새 뒤따라나온 서버가 '잠시만요'하고 나를 잡아세웠다. "Éric Pras 셰프님이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 네? 저랑요?!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나는 어느새 그의 안내에 이끌려 키친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쩐지 셰프님께 훌륭한 식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직접 전하고 있었고, 어쩐지 셰프님의 안내로 주방을 구경하고 있었고, 또 어쩐지 셰프님과 사진을 찍고 그는 내게 사인을 건네고 있었다... 으레 건네는 팬서비스겠지만,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위해주는 셰프와 스태프들의 배려심이 고마웠다. 





일전에 어느 정신건강전문의가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멀티태스킹 없이 혼자 오롯이 음식에 집중하며 식사하기'를 권한 걸 본 적이 있다. 평소 팀원들이나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 일이 잦고,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할 땐 항상 '밥 친구' 영상을 틀어놓는 나에겐 썩 와닿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Maison Lameloise에서 식사하는 동안 신선한 재료와 다양한 조리법으로 정교하게 빚어진 요리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충분히 음미하고, 정성 들여 묘사를 하면서 나의 미각, 후각, 시각이 섬세하게 제련되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의 장면까지 상상케 한다는 점에서, 좋은 음식을 맛보는 것은 아주 복합적인 '체험'이란 걸 새로이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모든 호의를 다해(Avec toute ma sympathie)'라고 적어준 에릭 프라 셰프님의 서명과 같이, 좋은 요리에는 누군가의 진심과 전문성이 가득 담긴다. 좋은 공연이나 앨범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수많은 호의와 정성을 맛보는 이 체험을 앞으로도 기꺼이 즐겨보고자 한다, avec toute ma sympat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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