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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언덕으로

by 고야씨

봄이 오는 소리를 안다. 어딘가 잠들어있던 얼음들이 똑 똑 똑 서둘러 땅으로 돌아가는 소리, 초록을 한가득 품고 유연하게 스미는 소리. 그러면 단단한 땅이 반죽처럼 변해 난 지구에 더 잘 달라붙는다. 노랗게 볕이 든 자리엔 동네 할머니들이 알록달록 꽃처럼 핀다. 새는 이렇게 노래하는지도 몰라.

겨울을 건넜어- 가뿐할 거야- 따뜻할 거야- 참을만할 거야- 이제- 봄- 봄- 봄-


우리 마을에서 봄이 맨 먼저 내려앉는 곳이 우리 집 맞은편 백 미터쯤 앞에 있었다. 온통 채도가 낮은 풍경에서 제일 먼저 색을 틔우는 언덕이었다. 초봄의 연두는 유독 햇빛을 머금고 빛나서, 그 무렵 언덕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나와 내 친구는 그곳에 가야 했다. 우리 마음이 먼저 가 있어서. 명작 동화 속에 나오는 피크닉이 저 언덕 위에 있을 테니 우리도 얼른 그곳에 가 봄을 펼쳐보고 싶었다.


냉이 캘 때 쓰는 빨간 채바구니 말고 삽화에 나오는 집모양 바구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비닐봉지에 크림빵과 멸균우유를 담았다. 나랑 내 친구 거, 두 개씩. 집모양 바구니나 체크무늬 천은 없지만 저 언덕 위 빛나는 연두색이 우리를 삽화처럼 칠해줄 것 같았다. 새침한 바람을 지나며 달렸다. 팔목에 건 봉지가 성가셔 바짝 쥐고 달렸다. 숨이 찼다. 언덕을 오를 땐 걸어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어.” 나와 내 친구는 말인지 숨인지 모를 것을 메아리처럼 주고받았다.


우리가 상상한 언덕 위는 연두색 풀이 촘촘하고 폭신한 동화 속 세상이었는데, 우리 앞에 보이는 건 성근 풀 사이 짙은 흙, 그 위에 빛나는 건 물기. 한 발 내딛으면 질퍽이는 흙이 내 발끝을 쓱 잡아당겼다. “여기만 이런가 봐, 저 앞은 풀이 많고 괜찮아 보여, 저 바위까지 가서 간식을 먹자, 그래, 그래, 질퍽이니까 발끝으로 살짝 가자.” 애써 밝게 주고받던 말도 꼭 메아리 같았다. 멀리 떨어진 곳엔 연두색 풀들이 촘촘하고 폭신한 카펫처럼 빛났는데, 막상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풀은 성글었고 땅을 질었다. 바위에 도착했을 때 신발은 흙투성이였다. 신발을 벗고 바위에 올라앉아 조용히 크림빵과 우유를 먹었다. 크림빵 냄새가 봄바람에 섞였다. 언덕을 내려갈 때 우리는 좀 무거워져서 터덜터덜 걸었다. 마른 길에 신발을 문질러 닦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우리는 ”언덕은 너무 가까웠어, 맞아, 너무 가까웠어, 내 생각에 저기 있는 산은 넘어야 할 거 같아, 다른 세상은 원래 산을 하나씩 넘어야 나오더라, 저 산 꼭대기 좀 봐, 저 나무는 왜 혼자만 저렇게 크지? 아, 그 나무 아닐까?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할 때 결승점, 그런 거 같아, 저 나무가 있는 곳에 가면 지금도 시합이 열릴지 몰라, 좋겠다, 가보고 싶다. “ 이런 얘기를 나누며 거의 원래의 무게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언덕, 우리의 모든 것이 동화고 봄 같다. 어떤 감각은 시간이 많이 지나간 후에야 느낄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종종 나는, 미래의 눈으로 지금을 감각하곤 한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미치도록 소중하고 애틋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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