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어떤 것은 나를 단숨에 과거로 데려간다.
그것은 물건일 때도 있고, 소리일 때도 있으며, 냄새나 장소일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맛이거나 사람이고, 어떤 때는 날씨와 빛의 특별한 조합이기도 하다.
늘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있고, 뜻밖에 불쑥 찾아오는 것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순간은 내가 떠나온 시간만큼 멀어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더 자주, 더 문득, 과거의 어떤 날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만나야 할 그때의 내가, 그때의 누군가가, 그때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적을 수는 없다.
하나의 일 안에도 상반된 생각과 감정이 제자리처럼 알맞게 자리할 때가 있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것이다.
내가 아는 건 내가 아는 만큼뿐인데
내가 쓴 이야기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으로 그어질까, 그런 게 두렵기도 하다.
읽는 사람이 없어도.
일요일 아침, 동네를 걸었다.
물가에 갯버들꽃이 피어 있었다.
갯버들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는 것 중 하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갯버들만 보면 내 아이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아니, 솔직해지자.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내 아이에게 하고 싶은 거다.
또 여기에도 적고 싶은 거다.
3월이면 나는 친구와 개울가로 갯버들을 꺾으러 갔다.
친구는 막내였고 나는 맏이였는데, 그래서 그랬을까?
경사진 풀밭을 내려갈 때마다 긴장되었지만 내가 앞장을 섰다.
“이 돌 밟고, 그다음엔 저기 밟아.”
다리 밑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면 갯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보들보들한 털북숭이꽃을 손끝으로 만지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거 만져봐, 이게 더 부드러워.”
“진짜네! 정말 부드럽다. 어, 이거 만져봐.”
다 같은 갯버들인데도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이상한 건, 정말 그랬다는 거다.
매번 새롭게 더 부드러웠다.
우리는 제일 부드럽고 귀여운 갯버들이 달린 가지를 꺾었다.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어두운 회색의 부드러운 꼬리 같은 꽃에서
곧 빨간색이 나오고, 노란색이 나오고, 연두색이 남는 걸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집엔 꽃병이 없었다.
나는 갯버들을 깨끗이 씻은 우유갑에 꽂아두었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그걸 보고 웃었다.
“이거 꺾어온 거야? 꽃이 아니네.”
하면서도, 제일 예쁜 유리병에 옮겨 담아주었다.
“엄마, 여기서 쪼끄만 꽃이 나와.
빨간 것도 나오고, 노란 것도 나오고 연두색도 나와.”
엄마는 갯버들보다는 진달래나 개나리같이 꽃처럼 생긴 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갯버들을 제일 예쁜 유리병에 꽂아주었던 건 엄마의 사랑이었을까?
나는 엄마에게 갯버들을 주려고
비탈길을 내려가고, 흔들리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용기가 필요했고,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이제 나는 내 아이에게 갯버들을 알려준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움, 빨간 수술의 색, 노란 꽃가루,
곧 나타날 연둣빛과 나의 기억들을.
아이는 모를 수 있지만, 그건 내 사랑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는 그런 가족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기록하는 이유 중 하나가
투박하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서럽고, 속상하고, 화나고, 웃기고,
시시콜콜한 것들 사이에서
사랑의 다른 말들을 찾아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갯버들을 담아 두었던 예쁜 유리병.
거기에 햇빛이 들 때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는지 나는 잊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