뿜빰뿜빰! INTRO

<로드 오브더 륑스>를 잇는 대작! 성-우로-드

by 이슬

*사진 출처 Unsplash, Diogo Nunes, 저는 저 플랫폼 못 들어가고 낍니다.



머글(muggle)* 중의 머글, 노말(normal)중의 핵 노말. 저는 어려서부터 명확한 취향을 선보이거나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묶어 준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엉엉 운다거나, 좋아하는 옷이 세탁기에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밖에 나가지 않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전 그저 마르고 조용하고 잘 휘청거렸습니다. 별 스타일이 없던 그 애가 자라서 제가 된 건데, 그렇다보니 당연히 저는 여전히 ‘취향’이라고 할 만큼의 일관되고 의식적인 기준이나 센스가 없습니다. 사실 이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의 부재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저는 늘 궁금하긴 했습니다.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엔 늘 있었거든요. 저는 그런 그들을 궁금해하면서도 그들이 사랑하는 어느 것에도 ‘빠지지는’ 않은 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해왔습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그 눈에서 나는 빛을 본 적이 있나요? 빛이 납니다. 음악을 좋아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LP를 사 모으는 제부, 영화를 좋아해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명작들을 찾아내 그것으로 세상을 보고 위로받는 친구, 지브리를 사랑해 그 OST 피아노 연주 공연을 보러 무려 미국을 1박 2일로 다녀온 동료. 그 짧은 여행 동안 아침 공연, 저녁 공연을 둘 다 챙겨봤다고 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만하죠? 아, 저 중 하나는 빨간 머리 앤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도 했습니다. 누군지 알 것 같나요? 이외에도 많아요. 새가 좋아 가방에 초코파이 12개를 넣고 종일 산을 누비는 대학 생활을 했다던 '새 아닌' 인간,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난다는 꽃덕후 책덕후 저의 글선생님, 그리고 커피를 좋아해 신선한 원두를 살 때마다 평소엔 잘 보이지도 않는 옥수수 같은 이를 살짝 드러내고 웃던 전 남친까지…. 이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적어보자니 그저 사랑스러워 웃음이 납니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스럽기 마련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들의 눈에서 저는 분명히 봤습니다. 어떤 빛을요.

만약 제가 소위 ‘덕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쓸 글들은 매 편마다 성우들을 한 명 한 명 소환하여 그들의 필모그래피와 인생 연기와 목소리의 특징과 유형에 대해 소개하는 벅찬 글로 가득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게 아니어서 저도 조금 민망합니다. 아니, 제가 제일 민망합니다. 덕심 없는 삶! 성우 학원을 다니면서 더더욱 드러나는 나의 머글성, 노말성…! 그런 지수를 재는 도구가 있다면 저는 아마 제로, 그 끝을 찍을 겁니다. “리루리루… 이게… 뭔 말이야?”, “이 주문은 어떻게 외치는 건데?”, “얘는 왜 칼이 돼? 그러니까 사람인 거야 칼인 거야?”, “이건 뭔 만화야?” 허허… 애니메이션 더빙 수업에서는 학원 친구들이 제 스승이죠. 이제서야 유명하다는 이런저런 작품들을 접해보지만 여전히 큰 감흥은 없습니다. 다만 ‘어려서부터 만화 주인공들이 해주는 말을 새겨듣는 아이였다면 인생에 파이팅이 넘쳤을까?’ 궁금해하며 웃을 뿐이에요. “재능은 꽃피우고, 센스는 갈고 닦는 것!”, “가능하고 말고가 아니야. 원하니까 하는 거야.”, “한계를 뛰어넘어!”, “마법이 없는 게 내 마법이야!” 같은 말들이요.

이런 제가 덕심과 덕력을 두루 갖추어야 입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성우의 세계에 발을 디딘 건, 우연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인생이 꽉 막혀 숨 한번 크게 쉬기 어려웠던 시기, 인권운동활동가랍시고 ‘말’이란 것을 머릿속에 꽉 채우고 언제든 주루룩 쏟아낼 준비를 하고 살던 때였죠. 지쳐 있었습니다. 아무리 말을 던져도 애초에 귀가 달린 것 같지 않은 세상에 질려 입을 닫아버렸고요. 그리고 성우학원엘 갔습니다. 네? 응? 네. 좀처럼 어이없고 맥락 없는 전개가 아닐 수 없지만 어쨌든, 저는 일주일에 두 번, 저와는 아무 상관없다 여긴 성우의 세계를 오가며,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말이 적힌 대본을 읽었습니다. 꾹 닫힌 입의 지퍼를 즈으윽 풀어 별생각 없이 입을 열 때마다, 신기하게도 숨통이 트이더라구요. 학원에 있는 동안에는 종일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세상을 향한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좋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가끔씩 제 눈에서도 제 사랑하는 이들과 같은 빛이 난 것 같아요. 정말로요.


“문장을 끝까지 책임져!”


저를 오늘까지도 성우라는 분야의 언저리를 맴돌게 한 건, ‘문장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성우’라는 어느 날의 가르침입니다. 성우는 목소리 연기자(Voice actor)고, 정보전달자고, 안내자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징검다리이고, 그러니까, 목소리 그 자체인데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성우에 관심이 있든 없든, 분명히 당신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성우의 목소리를 들을 거예요. TV, 라디오는 기본이고 온갖 광고, 버스와 지하철의 안내 방송, 영화의 예고편, ARS 안내음, 아이폰의 시리, 갤럭시의 빅스비, 제가 오늘 컴퓨터를 켜며 자동으로 연결된 네이버 샐리의 목소리까지. 성우는 어디에나 있지만, 그저 들릴 뿐입니다. 보이지는 않고요. 그러니 제가 그랬듯이 당신도 성우가 ‘목소리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들리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 그게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는, 소리로만 머물지 않아요. 문장을 한번 생각해 보면 쉬워요. 한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숨 쉬고 있는지를요. 빈 공간, 비어있는 그 공간. 쉼표, 말줄임표, 느낌표, 물음표…. 그러니, 말도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성우가 그 모든 걸 끌어안고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장 끝까지, 마침표를 찍는 곳까지 책임져야 한다고요. 저는 이 사실이 심장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좋아요.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왜인지도 모른 채, 저는 바로 이것 때문에, 이것을 배우려 매주 두 번 학원에 갑니다. 사랑에 빠져버렸나봐요. 귀 없는 세상에 말을 던지는 사람들! 끝까지 책임진 문장을 내놓는 사람들! 저는 그걸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볼 때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감동합니다.

제가 성우학원에 다니면서 깊이 숨 쉬었던 순간들을 담아 글을 씁니다.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던 시간을 되짚어 적습니다. 거기엔 제 미래가 될 현재도 적혀 있어요. 돌아보니 학원에 다니고 나서 제게 생긴 변화는 제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의 한 가운데 섰다는 겁니다. 저는 더 이상, 먼발치에 서서 구경만 하는 휘청거리는 아이가 아니게 되었네요. 아마 이런 저의 글을 읽다보면, 당신의 가슴 속에서도 무언가 꿈틀, 당신의 눈에서도 무언가 반짝 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흐흥,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때요. 그냥 이러고 사는 제가 우스워서 피식 하신대도 그것만으로도 저는 참 좋겠어요.

다만 성우 지망생들께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방송사의 공채 성우**가 되려 오늘도 치열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우고 있을, 자기만의 싸움을 해내고 있을 제 학원 친구들. 이 지망생들을 친구삼아 여지껏 학원에 다니면서도 ‘나는 성우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태도로 글을 쓴 것이 민구스럽네요. 또 앞으로 나올 글들에서 ‘성우가 되기 위한 팁’ 같은 것을 기대한 독자가 있다면 미리 고개를 숙입니다. 아쉽게도 저는 성우도 아니고, 제 글은 삶에는 아주 조금 유효할지 몰라도 당장의 합격과 취직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가를 떠나, 앞으로 나올 것들이 그때 제 삶에 꼭 필요했던 저만의 싸움이었다는 것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안일하게 들릴 제 글에 속상한 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해볼게요.



* 머글 : 평범한 사람을 이르는 말. 영국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 능력이 없는 보통 인간을 이르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네이버 국어사전.


** 한국에서 성우가 되려면 방송사의 공개채용을 통해야 한다. 공개채용을 시행하는 방송사는 KBS, EBS, 대원방송, 대교방송, 투니버스 다섯 곳이다. 그러나 다섯 개 방송사가 매년 시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보통 시험은 1차 (녹음파일, 이력서 제출), 2차 (현장 오디션), 3차 (오디션, 면접)로 진행하는데, 각 방송사가 서 너 명에서 많게는 열 명까지 선발하지만 시험 지망 인원이 1,000~2,000명까지 되기 때문에 경쟁률이 매우 높은 시험에 속한다. 이 공개채용에 합격하여 방송사의 전속 성우 기간 2년을 채우면 프리랜서 성우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 매주 화/목 연재합니다. <로드 옾더 륑스>를 잇는 대작! 성우가 되기 위한 여정! 성-우로-드! (다 뻥이고 둘 사이에 아무 연관 없으며 심지어 Lord와 Road임. 그래도 보러오세요.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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