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다! 내 뼈를 묻을 곳

성-우로-드의 시작. 나는 왜 성우학원에 가게 되었나

by 이슬

*사진 출처 Unsplash, Gracejoze, 갓차아아아-내 뼈를 받아라!


“해준, 노래를 배워 봐요. 몸통하고 입만 움직이면 되잖아.”

2016년에는 발목을 삐고, 2017년에는 손목을 다쳤으며, 2018년에는 목뼈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불운이 3년 연속으로 내 목들을 치고 지나갔다. ‘목’ 달린 신체 부위가 더는 없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던, 심히 험난한 시절이었다. 그때 만난 명랑한 친구가 내게 저런 말을 했다. “너에겐 아직 몸통과 얼굴이 남아 있어!” …맞는 말 중 맞는 말이었다. 당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마음은 지루를 넘어 우울을 향하고, 무언가를 시원하게 분출하고 싶은데 뭘로 그렇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던 차였다. 그러나 노래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타고난 저질 성대의 소유자로, 내가 노래를 하면 가족들이 웃은 지 30년이 꽉 찼다. “아이고~ 우리 딸의 노래가 저리도 아름답구나~”의 웃음이 아니다, 그것쯤은 나도 안다. 그러니 노래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들도 웃는 판에 남 앞에서 노래한다는 게 영 내키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찾아간 곳은 스피치 학원. 이름도 ○○스피치였다. ‘몸통을 울리고 입만 나불대면 되는’ 뭐라도 하고 싶었고, 평소 흐느적거리고 힘이 없어 쉽게 쉬어버리는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이참에 좀 더 자신감 있고 힘 있는 말하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하는 류의 말하기를 많이 하는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7년차 일 중독자 다운 선택이었다. *일 중독 진단 포인트: 취미마저 일과 연관 짓는다.* 학원은 집 근처에 있어 부담도 없었다. 홈페이지엘 가보니 현직 성우들이 선생님으로 있다고 했다. ‘와, 성우처럼 말을 잘하게 되겠구나!’ 이제 와 다시 보니 홈페이지엔 분명히 ‘연기자’라는 말과 ‘말하기’라는 말이 같은 비율로 섞여 있는데, 나는 ‘연기자’라는 것을 가볍게 간과하고 학원엘 등록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인간의 뇌가 이렇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남 앞에서 노래보다 더한 걸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첫 수업은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 단어에도 7,890개의 뜻과 느낌이 있다고! 여기의 ‘그런데’는 358번째 느낌! 그걸 살려줘야지!”

나는 선생님의 이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는데 그냥 국어책 읽기가 아니었다. 문장의 의도와 분위기를 이해하고,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 밑밥까지 깔아놓고 가는 ‘말하기’였다. 평소 글이라는 것에 애정이 있던 나는, 선생님이 자기가 쓴 것도 아닌 글에 저만큼의 애착을 가지고, 단어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쏟는 모습에 반해버렸다.

‘와이씨… 너무 멋있다.’

언어를, 문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우가 되는 거구나. 성우는 ‘목소리 좋은 사람’이라는 얄팍한 이해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유난히 작고 비실비실하던 내 목소리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나아질 내 앞날이 기대되어,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반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기죽지 않았다. 사실 그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이곳을 ‘말하기 학원’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첫 수업은 그 이해에 정확히 부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 수업에서 무척 당황하며 거기가 ‘성.우.’학원이라는 걸 몸소 깨닫게 된다. 수요일은 ‘캐릭터 수업’이었다. 나는 예고 없던 새 친구 장기자랑 시간에 뭉그적대며 도라에몽 노래를 불러버리고 말았고, 내가 자리에 앉자 반 친구들은 각자 연구해온 캐릭터를 세 개씩 꺼내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받기 시작했다. ‘아… 이런 거면 나는 못 하겠는데? 난 끼 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끼 없는 인생 30년 차! 장기 자랑은 안 하면 안 넘어가는 것이라는 생의 지혜는 터득한 바 있어 빨리해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아무거나 해버렸지만,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그 순간, 늘어져 있는 계란 후라이, 구데타마가 말했다.

"흐아암~ 조오올려어어~"

구데타마. 출처 https://blog.naver.com/mathcook50

'…뭐야? 구데타마가 온 거야? 지, 지금… 뭐였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니 온 몸으로 구데타마를 연기하는 한 영혼이 보였다. 그때 난 깨달았다.

‘여기다. 내가 뼈를 묻을 곳이.’

그때 구데타마를 준비해 온 친구는 몇 주 지나지 않아 “턱을 좀 집어넣고 (치아 교정을 하고) 다시 오겠다”며 학원을 떠났지만, 난 그 친구 덕에 1년 반이 넘은 지금까지도 학원을 다니고 있다. 메소드 연기로 나를 홀려 준 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고, 고마워~! 넌 구데타마 그 자체였어!


그날 그 진귀한 광경을 본 나는 너무 재미있어 심장이 간질거리기 시작했고, 수업 내내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싱글벙글. 캐릭터 사진을 가지고 와 거기에 맞는 희한한 목소리를 내는데, 모두가 진지했다.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진지하게 하는 곳이구나! 멋-찌다! 그리고는 연기 대본을 가지고 짝을 이뤄 “박 사장~ 김 영감~” 상황극까지 하는데, 뭐야… 이 짜릿함은? 평소에도 웃긴 상황을 상상하고 “야, 이랬으면 웃겼겠지”류의 말을 남발하며, 친구들에게 “제발 상황극 좀 하지 말고 말해” 소리를 듣던 내가… 하… 이곳에 오기 위함이었나? 나는 약간 수줍어하며, 내 취미를 정하였다.
‘이 학원 계속 다니기.’


성우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삶에 일이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고, 일 말고 ‘다른 세상’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성우학원은 딱 좋은 곳이었다. 물론 처음엔 머리가 아팠다. 숨도 쉬지 않고 8시간 풀근무를 하고 학원에 도착하면, 내가 푹-빠져있던 저세상과 너무 다른 세상인 이곳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학원과 내 일터는 간극이 너무 컸다. 내 일터는, 국경을 넘는 순간, 아니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심장을 어디에 빼놓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고, 그래서 내 세상은 그 사람들과 더불어 늘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학원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서로 어떤 고리도 없는 듯 보이는 두 개의 세상을 오가자면 편두통이 몰려왔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오는 학원이어도 매번 생경하고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두 달쯤 지나자 점차 나아졌다. 아마 내 일 중독이 치유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속한 세상 외의 세상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다. 이걸 ‘인정’까지 하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아, 다른 세상도 있구나. 내 일터만 세상의 전부가 아니구나.’ 이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알아챘다. 조금 외로워졌지만, 뭐, 금방 나아졌다. 그건 내 삶에 꼭 일어나야 했던 일들 중 하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을 쓰는 기쁨’을 알게 됐다. ‘말하기’라는 것이, 처음의 내 생각과는 달리 몸통과 입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한다’는 건 온몸의 에너지를, 그러니까 머릿속의 생각과 마음속의 감정과 그것들을 담아내는 내 몸의 떨림까지를 전부 전달하는 일이었다. 머리나 굴리며 살았지 몸은 훈련해 본 적 없던 내가 몸을 쓰는 기쁨을 느끼게 됐다니! 안 되던 것이 될 때(깤깤깤 마녀 웃음소리 같은 것)의 신기함, ‘나도 이런 게 되는구나!’의 기쁨! 내가 그것들을 평생 잊을 수 있을까? 내 호흡과 말투가 ‘나’라는 사람의 많은 부분을 말해준다는 것, 연기를 통해 내가 될 수 있는 것과 되지 못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까지….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능인, 노동자를 넘어서 나는 그냥 ‘나’라는 사람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책임도, 무게도, 역할도 없이.


학원을 다닌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성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없다. 방송사들이 너 다섯 명 뽑는 공개채용에 몇 천 명이 몰린다는 것은 마치 공무원 시험이요, 임용 고시요, 로스쿨 입시요, 아니, 그보다 더할 때도 있단다. 엄두도 내고 싶지 않다. 물론 가끔 상상은 해 본다. ‘성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녹음실에 들어가 일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러나 난 높은 확률로 역할극 놀이를 세상에서 제일 진지하고 재미있게 해주는 이모가 될 거고, 동화책을 정말 실감 나게 읽어 “또요, 이모 또 읽어주세요!”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될 거다. 하지만 굳이 쓸모를 찾기보단, 이러나저러나 난 여전히 재미있어서, 단지 그 이유로 아직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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