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슬 Aug 10. 2021

디스옥타비아


  전에 없이 눈동자 가장자리가 흐릿하다. 거울에 흰자와 검은자를 번갈아 비춰보았다. 진짜 흐릿하네. 동공까지 관리한다는 어느 연예인 생각이 났고, 눈동자가 흐릿하면 간에 이상이 있는 거라던 말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안약에다가, 간에 좋은 약도 사야 하나? 잠시 눈알을 굴렸다.

  별수 없지. 손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시간이 흐르니까 몸의 이곳저곳이 변하는 거다.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공까지 관리하기엔 티 나게 아픈 어깨 관리도 안 되는 중이고. 거울 속에 있는 나에게 속상해하지 말라고 좀 웃어주고 욕실을 나왔다.


  또렷한 시기를 지나는 거다. 모든 게 또렷하고 명료하고 확실하던 시기를. 내 몸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한번을 멈추지 않고, 되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소멸을 향해서. 이렇게 눈에 보이게 변하는 몸이 없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언제까지나 또렷한 사람? 아, 얼마나 피곤한 일이야, 영영 젊고 또렷하다는 것은. 무한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몸이 더 존재하지 못하는 때가 결국에는 온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아주 자주, 다가올 소멸로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 흐릿해지는 것이 덜컥 겁이 날 때 조금 태연한 척 할 수도 있고. 


  예전에는 또렷해서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또렷해서 나를 괴롭힌다. 번잡하고 정신 사나운 도시에선 모든 말이 너무 크고 또렷하다. 귀에 들려오는 말이 확신에 차 있을수록 나는 입을 더 꼭 다문다. 더 보태지 않겠다는 오만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생애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우리의 생 같은 게 어디 있어, 각자의 것뿐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확신하지 마, 아무것도 확언하지 마.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놀랄 만큼 관심이 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저 그들 삶의 마지막에 어떤 말이 남을지만 궁금하다. 삶은 자꾸만 흐려지는 것인데 그럼 삶의 마지막에는 뭐가 오는 건지. 어떤 말이 남는 건지. 남기는 남는지. 남는다면 그게 내가 아는 말일지, 모르는 말일지.  




  할머니는 아빠가 영영 죽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요새는 재미라는 게 하나도 없어,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 네 아빠가 살아 돌아온다면 모를까, 하고선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네 아빠가 영영 죽은 것은 아니야. 나는 할머니가 귀신이라도 보는 걸까 싶었지만, 내 얘기였다. 나와 동생 얘기였다. 내가 있고, 동생이 있으니 아빠가 영영 죽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응... 할머니, 나는 아빠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고, 아빠가 마지막으로 들을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건 마침표를 찍지 못한 그런 기분이에요. 그래서 나는 자꾸 아빠에게 궁금한 게 생기고, 영원히 궁금해지고... 그렇게 아빠는 영영 죽지 못해요. 


  아빠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진다. 그 자리에는 아빠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대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구급차에 타면 1 더하기 1이나 2 곱하기 2 같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한다던데, 수학을 가르치던 아빠가 그런 질문에 대답을 못 할 리는 없었을 거야, 하다가도 아빠 휴대폰에 붙은 '무명남'이라는 이름표를 떠올리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이름조차 말하지 못했던 걸까. 


  이제 엄마는 생각날 때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유언을 하고, 동생은 온라인에서도 죽으려고 촘촘한 준비를 해 두었다. 나는... 아직은 죽지 않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항상 무섭다.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는 사람들이 내가 죽은 뒤에도 아직 있을 것이. 그들에게 전해야 할 말을 미처 전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정말로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에 꼭 줘야 할 것을 주지 못할까 봐. 그러니까 마침표 같은 것. 


  돌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할머니에게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말을 미리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여든 여덟 번 째 생일을 맞은 날이었고, 그냥 내 마음만 급한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른한 목소리로 갑자기 열 몇 살 때의 얘기를, 또 갑자기 신혼 초의 얘기를 했다. 아랫배가 차서 구절초 한 보따리를 온종일 뜯었던 날의 고단함, 그걸 그날 밤에 바로 삶아 먹곤 우리 아빠를 낳은 때의 안도감, 그러다 다시 올여름의 더위, 들깨도 타 죽고 고추도 타 죽는 올여름..... 그는 50년이나 70년 같은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 시간 저 시간을 다녔다. 


  잠이 들랑 말랑한 목소리로 시간 여행을 하고 나면, 그 여행의 끝에는 검게 쪼그라든 피부가 남는다. 할머니는 갑자기 TV를 보며 "저 선수들은 속상하겠어, 피부가 까매서" 했다.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었다. TV 쪽을 돌아보며 뜬금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게 시간 여행을 마무리 짓겠다는 사인이었던 것 같다. 밀가루처럼 뽀얬는데 이렇게 됐어. 손으로 다른 쪽 팔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이 말을 하면, 할머니가 다시 지금으로 왔다는 뜻이니까. 그 몸을 꼭 안을 걸 그랬다.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할머니의 부모님과 어린 시절과 책보자기와 시냇물, 전쟁과 피난, 죽은 남편과 새 남편, 얼굴만 예쁜 남편을 안다. 들깨를 직접 길러 기름을 짜는 생활과 열 개 넘는 장독대와 심으면 열리는 것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산에서 튀어나왔던 뱀 한 마리까지 벌써 내 세계로 들어와 있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시간과 그때 존재했던 것들을 기억한다니. 말도 안 돼서 웃음이 난다. 기묘하다. 어쩜 이런 일이 있을까. 나는 온통 할머니로 가득한 할머니의 세계에 드나드는 걸 조금 더 하고 싶다. 욕심을 보태자면 그 세계로 가는 문이 영영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귀신도 모르게 죽을 뻔했다던 그 밤처럼 자꾸자꾸 살았으면 좋겠다. 소화제를 먹고, 물을 한 컵 벌컥 마시면서 "아유 안 되겠다, 모르겠다, 살아야지." 자꾸만 그랬으면 좋겠다. 


  나에게 와서 흐르던 시간이 언젠가 나에게로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그때까지는 할머니도 죽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 해도 영영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무엇일까 미래를 되짚어 본다. 아빠가 하지 않았던,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되짚어 본다. 그건 아무래도 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가 봤던 시간 안에 있다. 그가 살고 내가 사는 동안에 이미 나누었던 말속에 있다. 우리에게 마침표 같은 게 있겠나, 싶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어, 다만 각자의 생뿐이지.  








디스옥타비아-2059 만들어진 세계, 유진목 지음, 백두리 그림, 알마, 2017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마음을 좋아한다. 구름을 따라 움직이는 나의 마음을. 그러니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타인을 향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삶에 대해 입을 다물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_63쪽 


**나에게 와서 흐르던 시간이 언젠가 나에게로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_75쪽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우주로 출근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