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를 엿보는 모범생이 경계의 엣지를 즐기다]
어느 날 운동 트레이너가 물어봤다. ‘일탈이라는 걸 해본 적은 있어요?’
질문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일탈이라는 것이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잘 모른다. 대부분 내 또래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나 대학 다닐 때 일탈이라는 걸 해봤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 때 친구들이 빨간색 표지의 소설을 많이 읽을 때 나도 한번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들춰라도 보려하면 ‘넌 그런 거 읽으면 안 돼’ 하면서 빼앗았다. 고등학교 때는 남녀공학에다가 심지어 오고가는 통학 셔틀 버스도 함께 타고 다녔다. 그런데 아침에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매번 말리지도 않은 젖은 머리로 통학 버스를 탔다. 3년이 지났음에도 아는 남학생이라고는 매번 모의고사 후에 복도 중앙에 게시된 성적 순위 종이에서만 본 이름 뿐이었다. 대학 다닐 때는 자체 휴강이라는 걸 두어 번 해본 듯하다. 입사 10년이 넘어서 가끔씩 사내 라이프 상담센터에 가서 다양한 성격 유형 검사를 재미삼아 하곤 했는데, 어떤 상담사께서 ‘정해진 경계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분이시네요’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딱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서예를 쓰고, 리코더를 불었으며, 태권도, 속독, 피아노, 미술, 주산, 기억법 학원을 다녔고 다양한 글짓기, 그림 등 행사가 많아서 어느 학년에는 상장을 30여개를 탄 적도 있었다. 주산학원을 다닐 때는 비가 오면 친구들끼리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버스가 잠깐씩 정차할 때마다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머리를 참문 밖으로 내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고, 찰흙을 작고 동그랗게 뭉쳐서 우산 위로 던지면 찰싹 달라붙는 그 느낌을 즐기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관지가 많이 약해서 매일 병원에 갔다가 학교에 늦게 가는 것도 싫었고, 초등 3학년 때까지 소풍날만 되면 매번 집에서 엄마와 김밥을 싸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어서야 소풍도 가고 피구 후보 선수를 하기도 했고, 여자 야구팀에 들어가서 선수로서 동네 오빠들에게 글러브로 야구공 받기, 배트로 공 받아치기 등을 배우기도 했다. 친구들 따라 성경학교 때마다 여러 곳의 교회를 쇼핑하듯 다녀보기도 했다. 동네에 새로 생긴 롤러 스케이트장에는 달고나 만들어 먹는 재미로 자주 갔었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서는 바짝 마른 키 작은 5학년이 자전거 릴레이 경주에서 쌀 배달하는 커다란 자전거로 동네를 돌기도 했다. 그리고, 서예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방과 후에 남아서 ‘ㄱㄴㄷㄹ’ ‘ㅏㅑㅓㅕ’ 반복 연습이 지겨워 도망쳐서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녔다.
이렇게 친하게 지낸 동네 친구들 중에서 누구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누구는 변두리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평범한 고등학생은 나 혼자인 듯 했다. 가끔씩 친구들은 어떻게 쟤를 알아? 어떻게 너랑 친구야? 의아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어울렸지만 모든 것을 함께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갈 때는 가고 가지 않아야 할 곳은 가지 않았으며, 함께 할 것은 하고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에 친구들이 나를 모든 곳에 데려가지 않은 은따이거나 내외하는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도 CA(Change Agent)라는 총무같은 역할을 하면서 부서 안에서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은 거의 다 시도했었다. 선교단체에서 배웠던 많은 레크레이션, 팀웍 활동, MBTI 검사, 생일 챙기기, 회식, 연말 선물 교환, 맛집 탐방, News Letter, 연말 롤링 페이퍼, 분기별 부서 전체 운동회 등 이벤트 활동, 그룹장님 팀장님의 생일 챙기기, 스승의 날에 파트장에게 주는 감사 롤링 페이퍼, 매월 여사원 테마 모임, 점심시간에 모여서 책읽기, 봉사활동 등 크고 작은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벤트 에이전시처럼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했다.
그리고는, 몇 년 뒤에 또 다른 상담사께서 나와 같은 성격은 직장 생활에서 같은 일만 하면 지루하니 CA 이런 거라도 꼭 자발적으로 하셔야 한다고 당부를 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웃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회사 생활을 돌아보았을 때, 만약 다른 사람들처럼 한 가지 업무의 전문성으로 20년을 다녔다면 아마도 진즉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같은 일을 안정적으로 하지 않고 어떤 주기로 업무 변경과 확장이 있었고 이렇게 양념 같은 역할은 내가 일을 즐겁게 하도록,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두가 기술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인 개발 조직에서 다양하면서 새롭게 구축하는 업무를 주로 하다 보니 가끔은 ‘그래서 너의 업무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셨다. ‘멀티 플레이어’ ‘제너럴리스트’에 대한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음에도 한마디로 대답을 똑 부러지게 못하고 장황한 설명을 해야 하니 가끔은 ‘사실은 내가 무능력한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많은 역할 속에서도, 회사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역할이 있었다면 그건 ‘마스코트’이다. 마스코트는 사실 누구나 되는 것이 아닌데도 분수도 모르고 나를 과대평가했었다. 예를 들어, 신입사원 시절만 해도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었다. 어느 날엔가는 입사 동기들이 너는 성격도 좋고 머리도 길어서 치어리더 응원단에 뽑힐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 머리를 완전 짧은 숏 커트로 잘랐다. 인사 담당자인 대리님이 ‘머리를 왜 그리 짧게 잘랐냐?’고 해서 치어리더 응원단에 뽑힐까봐 그랬다 했더니 웃으면서 ‘야, 넌 안 돼. 키가 작잖아.’ 맞다. 난 160cm 이하의 작은 키를 소유했다. 괜한 과대 자긍심과 정보 부족으로 긴 머리카락만 날아갔다.
어떤 글에선가 ‘업무에서 같은 실수를 해도 예쁜 여자가 못생긴 여자보다 더 많이 혼난다.’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외모가 출중하면 일도 잘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기는데, 이것은 못생긴 외모를 소유한 사람보다 크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실수에도 기대에 대한 상대적 실망감이 그만큼 커져서 표출되므로 더 많이 혼이 난다는 이치이다. 외모가 출중하면서 일을 잘해내거나 업무 외의 다른 능력으로 유명세를 먼저 타게 되면, 일을 잘해내는 능력 보다는 외모 능력 덕분이라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업무 능력과 성과가 파묻히게 되기 쉽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감의 부정적 반영이고 표현이다. 그 글을 읽은 이후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혼이 났다고 생각이 들면 혼자 속으로 ‘내가 예뻐서 그래.’라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꽤 심리적 자유를 주었다.
두더지 잡기 게임은 두더지 머리가 올라올 때마다 세게 망치로 두드려서 맞추면 점수가 올라간다. 사람들은 올라오는 두더지를 망치로 내리치면서 즐거움을 얻는다. 회사 안에서 여사원은 몇 되질 않아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구별이 되었다. 거기에 마스코트 역할까지 한다면 그건 최악이다 생각해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일등이 아닌 이등으로 숨는 법을 자연스럽게 눈치로 배웠다. 어떤 사람이 일등의 자리를 즐겼을 때 돌아오는 시기와 질투를 보면서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밀쳐내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리 애를 써도 일등이 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생명의 시간 중에서 수면을 제외하고 소중한 50%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최대한 알차게 보내며 인생의 자유를 누려라. 일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함을 마음껏 최대한 활용하고 누려라. 직장은 최고의 비즈니스 스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살아있는 경험을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돈을 받으며 배우는 최고의 배움의 터전이 바로 직장이라고 생각하자. 어쩔 수 없다는 좌절감과 해보기도 전에 한계선을 긋고 안 된다고 포기하기를 반복한다면 그것도 습관이 된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도 정말 필요하고 중요함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자가 면역 질환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공격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방식은 없는지, 지금 이 대안이 최선의 방안인지를 묻고 물으면서 미지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뜻밖의 희망의 씨앗을 만날 수 있다. 일터는 매일 매일 새로운 프로젝트와 전투를 벌이는 전쟁터 같기도 하지만 낯선 사람과 환경, 낯선 프로젝트와 만나서 불안감과 불확실성 속에서 일을 하는 경험은 결국에는 해냈다는 희열을 느끼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직장이라는 경계 안에서 자신만의 엣지를 마음껏 즐기지만 분명히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열려 있고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의 회사를 퇴사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회사를 다니면 누구나 한번쯤 자신만의 시기에 퇴사를 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직무를 바꾸게 되면 그에 대한 평판이 돈다. 가끔씩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들으면서 나의 평판도 궁금해진다.
조직에서 어떤 리더는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과 좋게 지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점 멀리하고 떠나가서 점점 외로워지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리더는 사람이 차갑고 매몰차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다 에서 시작하여 매사에 감정의 흔들림이 없고 공사가 분명하고 경계를 분명히 지키기에 공정함이 그분의 강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리더는 사람들의 강점과 재능을 최대로 활용하여 프리라이더를 최소화하여 구성원 각자 자신의 일의 몫만큼을 감당해 내게 하여 어떻게든 조직의 자원을 최대로 사용하시는 분도 있다. 어떤 리더는 자신이 선호하는 구성원과 함께 동행하며 드러내놓고 치켜세우면서 힘을 실어주기도 하지만, 어떤 리더는 자신이 누구를 선호하는지 최측근이 아니고는 알지 못하게 신뢰하고 뒤로 챙겨주기도 한다. 어떤 리더는 겉으로는 강성이고 부러지지 않을 듯 보이지만 속은 여리고 상처 잘 받고 인간적이기도 하고, 어떤 리더는 겉으로는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권위적이고 무책임하며 비열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어떤 리더는 구성원 중에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여서 성과의 결과 보다는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는데 더 힘을 쓰고, 어떤 리더는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며 빈익빈 부익부 행태의 평가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리더 스스로의 가치관, 스스로 겪었던 경험, 자신의 모델링이었던 분들에게 배운 방식을 토대로 자신만의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는 함께 일하고 싶었던, 앞으로도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고 싶다.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 클 때 성과의 시너지도 크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또 개인적으로 능력도 있으면서 진정성도 있는 사람이고 싶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알지도 못했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받았던 도움을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되돌려주고 싶다. 그러면서 함께 각자의 성장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사람이고 싶다. 옛날 과학실에 아래쪽에는 삼각 플라스크가 있고 위쪽에는 비커처럼 생긴 부흐너 깔때기가 있는 필터로 여과 장치가 있었다. 위쪽 비커와 아래쪽 삼각 플라스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계속해서 위아래로 순환하면서 정화해주는 장치다. 이런 필터 장치처럼 한쪽이 ‘나’이고 다른 한쪽은 ‘타인’이어서 계속 서로를 정화해 주며 존재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고 싶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는 것을 삶에서 드러나는 사람이고 싶다. 마침내는 나 스스로를 돕는 것이지만, 먼저 타인을 도움으로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고 싶은 거다.
불교의 수행덕목에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있다.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자리(自利)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다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지혜와 덕목이 쌓이는데 그런 지혜와 덕목이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자리이타에서 ‘이타(利他)’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자리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도움이 되게 노력하는 이타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자리이타다. 다만 여기서 우선순위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도움이 되는 수행을 반복할 때, 그런 노력이 경지에 이르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지혜가 생긴다는 의미다.
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진면목은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 때 드러난다. 나라는 사람도 자리이타적인 모습으로 갈고 닦아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선한 의지의 과정과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를 돕게 되는 아름다운 순환이 삶에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갑자기 1994년 인도 여행 중에 내 생일에 정말 무지하게 큰 무지개가 마당에 커다랗게 떴었던 기억이 난다. 약속의 상징인 무지개를 생일 선물로 마음에 새기면서 그때는 막연하게 언젠가는 내가 인도에 다시 오겠구나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30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 후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또 다른 기회에 윌리엄 워즈워드가 『서곡』에서 말하는 ‘시간의 점(spot of time)’이 찍히기를 희망한다. 시간의 점이란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직간접적 경험의 흔적이 내 몸에 남겨서 생긴 얼룩이나 무늬를 말한다. 인도 여행에서 경험한 무지개는 나에게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시간의 점이다. 시간이 지나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는 추억의 점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 여기서 나는 어떤 시간의 점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시간의 ‘점(點)’이 연결되면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선(線)’이 형성되고, 그 선이 모여서 그 사람 특유의 ‘면모(面貌)’가 만들어진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직장생활의 경험도 알게 모르게 내 몸의 세포에 새겨지며 저마다의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