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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ug 07. 2022

지금 영국은 가뭄과의 전쟁 중

"땅을 파내고 새 흙을 덮어둔 상태로 당분간 놔둘 계획이야."


얼마 전 마크가 자기 집 잔디를 가리키며 내게 해 준 말이다.


마크의 집은 우리와 담장을 맞대고 있고 정원도 나란히 위치해 있기에 서로의 집에서 소음이 발생하면 영향을 받는다. 몇 년 전 이사한 후부터 집 내부와 정원을 새로 꾸미느라 옆집에서는 간혹 드릴 소리와 못 박는 소리가 나곤 했다. 한밤중에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우리 쪽에서 창문만 닫으면 웬만한 소음은 차단되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번처럼 주변에 공사 장비와 업체 차량이 들어오고, 소음이 나면서 우리가 불편을 겪을까 염려되면 마크가 미리 통보해왔다. 


현 잔디가 있는 땅을 완전히 파내고 그 위를 새 흙으로 덮어 땅을 고른 뒤 잔디 뗏장을 덮는 것이 마크의 계획이다. 그 정도 작업이면 반나절 안에 끝난다. 이 과정에 굴삭기가 와서 땅을 파느라 소음을 일으키고 흙먼지가 날릴 수 있다.  


반나절만에 작업을 끝내려면 땅을 파헤치고 그 자리를 깨끗한 흙으로 덮은 뒤 물을 뿌리고 뗏장을 깔아야 한다. 또한 새로 깐 잔디에 물을 뿌리는 작업도 곧바로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마크에게 닥쳤다.


↑ 며칠 전 수도 회사에서 내게 보내온 이메일이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아마 마크도 받았으리라. 강 수위가 현저하게 낮아질 정도로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으니 물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내용이다. 사실, 경고장이라 할 수 있다. 위 사항을 위반할 경우 최대 1천 파운드 (한화 약 158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유사한 내용의 편지가 우편으로도 도착했다.


가정과 기업체, 공원, 학교, 병원, 스포츠 시설까지 온통 초록빛을 자랑하는 잔디를 흔하게 볼 수 있는 영국이다. 눈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닌 그 위에서 마음껏 밟고 달리고 드러눕고, 또 어떤 때는 무분별한 바비큐 파티로 까맣게 태우기까지 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사계절 고른 강수량 덕택에 일반 가정에서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잔디 물 주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일주일에 최소 두어 차례 비가 오기 마련이고, 설령 건조한 시기라 하더라도 한 번씩 수도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면 그만이다. 


올 들어 영국은 이례적인 가뭄을 겪고 있다. 여름으로 들어서면서 무더위와 건조한 날씨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니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오늘도 비가 오려나?'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영국에서 '제발 비가 오면 좋으련만'으로 염원할 정도다. 호스를 이용해 직접 물을 뿌리는 가정의 잔디는 그나마 푸른색을 지켜내고 있지만 넓디넓은 공원의 잔디는 노랗게 변하다 못해 말라붙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제 가정집 잔디도 가뭄의 고통을 견뎌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thesunchronicle.com


↑ 올해 7월, 런던에 있는 그리니치 공원의 모습이다. 추수를 끝낸 들판이 아니라, 잔디로 뒤덮인 언덕에 위치한 공원이다. 내가 사는 동네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thesunchronicle.com


↑ 썰물 때의 갯벌이 아니다. 웨스트요크셔에 위치한 저수지다. 물이 가득 들어차야 할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영국에 호스 파이프 사용 금지 (Hosepipe ban)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예전에도 가뭄이 심해질 때면 영국에서는 물 사용을 제한해왔다. 가정에서 호스를 연결해 물을 뿌리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잔디에 물 주기도 안 되고 세차도 안 된다. 호스로 물 뿌리며 청소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또한 미니 풀장에 물 채우기도 안 된다.


이번 물 사용 제한은 영국 전역이 아닌 지자체별로 실시하고 시행 기간도 조금씩 다르다. 우리 동네는 8월 5일부터 실시된다. 이 때문에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던 마크의 애초 계획은 이제 불법이 된다. 


마크는 궁여지책으로 잔디를 파내고 새 흙을 부어 다져놓는 작업까지만 하기로 했다. 나머지 작업은 정상적으로 물 사용이 가능할 때 재개하는 셈이다. 이미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는 잔디도 물 부족으로 말라비틀어질 판에, 잔디 뗏장을 옮겨다 놓고 물을 주지 않았다가는 곧바로 죽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물 사용 제한은 언제 해제될까?


위 이메일 경고문에는 강 수위가 정상으로 돌아갈 때까지라고 되어 있다. 당장 내일부터 비가 온다 해도 일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강과 저수지의 수량이 예전처럼 채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위 이메일보다 이틀 앞서 집으로 도착한 종이 경고문에도 강 수위에 대한 언급은 동일하게 나오는데, 최소 21일간 물 사용 제한이 지속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집은 예전부터 부엌과 욕실에서 나오는 허드렛물을 빈 우유병에 모아두었다가 집안 곳곳에 활용해왔다. 영국 정부가 가뭄을 대비해 권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덕분에, 정원 딸린 3인 가족의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 사용량이 적다. 


- 우유병이 걸리적거린다.

- 호스를 연결해 정원에 물 좀 시원하게 뿌려보자.


라며 나의 물 아끼기 프로젝트를 달가워하지 않던 우리 집 남자들의 불평이 이번 기회에 잠잠해질 걸로 기대한다.


참, 시간은 걸리겠지만, 옆집의 새 잔디 프로젝트도 무사히 진행되길 빌어본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Oleksandr Sushk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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