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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23. 2022

우리 영국에 사니까, 영국식으로 하자

"숙진이, 아줌마 다 되었네."


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J가 내게 건넨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학생이던 나를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당연히 나이 들어 보이겠지. TV 속 연예인도 아닌 40대 여자가 20대 모습을 간직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서로 막역한 사이도 아닌데 첫인사로 듣기는 거북한 소리다. 그렇게 말한 J도 2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채 등장해놓고 왜 내 얼굴만 가지고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J는 영국에서 만난 고향 사람이다. 


고향 사람이긴 한데 고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우연히 J가 내 주민번호를 보고 동향 사람임을 알고 알은체를 하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인연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한국에 있을 때 자주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고, 고향에서 마주친 일은 더욱 없었으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다 우연히 영국에서 다시 연락이 된 것이다.  


나는 인간관계를 적극적으로 넓히는 편이 아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나와 가족을 이용하려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있어서다. 또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J와의 인연을 굳이 다시 이어갈 이유는 없지만 고향 사람이라는 끈 때문에 그리고 나보다 연장자이고, 먼저 연락해온 사람이니 차단할 이유도 없었다.


올해 몇 살이 되었나?

왜 애는 하나밖에 안 낳았나?

무슨 일 하고 사나?

신랑은 무슨 일 하고? 

영국에는 왜 왔는데?

영국에 몇 년 살았는데?

집은 어디에 있고?


J가 세세하게 물어왔다. 고향에서 만난 어른이 흔히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J는 호적상으로만 고향 사람이지 사회에서 만나지 않았나. 그런 J가 고향 어른처럼 나오는 태도가 어색했다. 나에 대해서는 세세히 물어보면서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히려 들지 않는다. 자신이 박사 과정을 거치며 겪은 일과 공부 잘하는 딸에 관해서만 자랑스레 말할 뿐이다.



"내가 영배 형님보다는 아래지만 영훈이 보다는 위거든..."


영배, 영훈은 내 삼촌들 (가명)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나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다 보니 대화가 나이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나는 내 나이부터 곧장 밝혀야 했지만 J는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나이를 직접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J는 나이를 알려줄 듯 말 듯하면서 아리송하게 말한다. 


내가 큰삼촌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머릿속 짐작으로 J의 나이를 맞추라는 건지. 말 안 하면 그뿐인데 듣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영배, 영훈 삼촌을 언급하며 은연중 자신이 삼촌뻘 어른임을 계속 강조하는 듯하다. J가 언급한 내 삼촌들은 8남매 중 맏이인 내 아버지보다 한참 뒤에 태어나, 나이로만 따지면 내게 오빠뻘이다.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두 문화권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대화나 행동에서 이질적인 요소를 드러내곤 한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문화가 뒤섞인 대화법이 불쾌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쪽과 저쪽의 문화를 구실로 갖다 대기 때문이다.


내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내 나이를 먼저 물어놓고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나이 같은 거 안 물어보잖아, 라고 얼버무리며 말이다. 



"이건 한국식 (영국식)이거든요."


외국인으로 살면 문화적 차이로 인해 타인과 의견 충돌할 때도 있다. 한국인의 눈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영국인에게는 낯선 생활 방식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같은 행동이라도 한국인과 영국인이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에,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으면 이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이건 한국식이다' 혹은 '이건 영국식이다'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했다. 두 나라의 문화를 가지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 내게 더 유리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문화적 차이임에도, 내 낯선 행동에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훈계하려는 이가 있으면 나를 방어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두 문화권을 오가는 애매모호한 대화와 행동을 하는 셈이다. 




대화 내내 친척 어른 행세를 하던 J에게서 느낀 불쾌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모임 장소를 정할 때도 내 의견을 무시했다. 내게는 멀고 불편한 지역이라 차라리 J가 사는 도시가 편하니 내가 가족과 함께 가겠노라 제안했다. 집에 초대할 필요도 없이 여유될 때 근처에서 만나자고도 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애초에 정한 장소도 가볼 만하다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애는 왜 하나밖에 안 낳았냐, 아줌마 다 되었네 등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발언으로 대화도 이어갔다. 


불쾌하기 짝이 없고 지루한 대화가 끝난 후 다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J가 한마디 던진다.  



"우리 영국에 사니까, 영국식으로 하자. 각자 먹은 만큼 돈 계산하자고."



커버 이미지: Photo by Jopwell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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