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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Feb 06. 2022

영국에서 번역가로 일하면서 자주 듣는 말

단순히 번역가라고만 해도 될 제목에다 영국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번역할 때는, 내 일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그다지 없었다. 업무나 학업에 필요한 외국어 자료를 번역해줄 도우미를 찾을 때 말고는, 대부분 번역을 자기와는 무관한 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에서 만난 이들은, 특히 나처럼 외국인의 경우, 내가 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이미 2개 국어 사용자인 데다 해외에서 종사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된 환경이라 그런 듯하다.


영국에서 내 직업을 소개하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그런 종류의 번역이 있는지 몰랐어요


사실 이 질문보다는 '무슨 책/영화 번역했어요?'가 먼저 나온다. 누구나 낯선 직업의 세계를 접하면 이와 유사한 질문을 하기에, 이 질문 자체가 특별하지는 않다. 


배우라고 하면 '무슨 영화/드라마에 출연했어요?' 

건축가라고 하면 '무슨 집/건물 지었어요?'


라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번역가라고 하면 극장 스크린이나 책 귀퉁이에 나오는 '번역 (혹은 옮긴이) XXX'이라는 문구를 떠올릴 것이다. 나도 책과 영화 번역에 참여한 경험은 있지만, 제목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은 아니다. 누구나 알만한 책이나 영화는, 번역을 거치는 무수한 작품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책과 영화가 아니라도 뉴스와 광고, 드라마, 다큐멘터리, 편지, 이메일, 보고서, 판결문, 연설문, 홍보문, 안내문, 경고문, 발표 자료, 매뉴얼, 교재, 게임, 웹사이트, 논문, 설문지, 포스터, 공문서까지 번역이 필요한 분야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나도 소개해줄래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듣고 나면 그다음으로 하는 질문이다.


평소 번역에 관심이 없던 사람마저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일부 내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설명을 쉽게 잘한다는 평가를 듣는 편이다. 사범대 출신이라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잘 아는 분야에 한해서다. 번역은 물론 내 관심사와 취미까지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한다. 영국에 살면서 생소한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직접 부딪히며 경험한 일을 글로 적다 보니 생겨난 습관일 수 있다. 또한 영국 생활에 관해 문의하는 이들에게 상세히 답변해주면서 길러진 태도도 있다.


상대가 이해가 잘 된다고 하니 기분은 좋지만, 한 가지 문제점은 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듣고 나면 번역이 쉽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영어를 조금만 해도 가능하구나'로 여긴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어 공부는 어떻게 해요?'라고 묻던 사람마저 자기도 해보고 싶으니 소개해 달라고 나온다.


이해가 잘 된다고 해서 일이 쉬운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의 인체와 건강 관리, 수술 과정을 쉽게 설명해준다고 해서 의사의 강연만 듣고 곧바로 의료 현장에 나설 수는 없다.


첫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영국에서 번역에 대해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고국에서 질문하는 사람과 다르다. 외국인으로 살면서 구할 수 있는 직업이란 한정될 수밖에 없기에 내가 하는 일에 직접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출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평소 관심 있던 분야도 아니면서, 내 설명만 듣고 번역을 하겠다 나오는 사람은 대체로 번역을 잘 모를 가능성이 있다. 면전에서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거래하는 업체를 소개해주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안 해주기도 곤란하다. 하지만, 이들을 대처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하는 일을 간략하게만 알려주었으므로 본격적으로 번역이 무엇인지 밝히면 된다. 밤잠을 설치거나 주말을 포기하고라도 마감 기한을 맞추는 건 기본이다. 해외 거주자라면 고국에 있는 업체와 거래하기 위해 시차를 달리하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번역문의 정확성을 위해 원문과 대조하고 자연스러운 문구로 다듬는 작업까지 수 차례 반복해야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기술, 신조어, 신생 학문을 공부할 각오도 되어야 한다. 각종 컴퓨터 문서 기능, 편집, 번역에 활용되는 프로그램까지 습득하고 때로는 이에 필요한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가족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대부분의 질문자는 이 정도만 언급해도 기겁을 한다. '그렇게 힘든 일이었어?'라며 뒤로 물러 선다. 


번역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영국에서 만난 사람 중 지금껏 서너 명 정도가 그래도 해볼 수 있겠다 나온 적 있다. 출신 국가도 각기 다르다. 다들 번역가의 자질이 보였기에,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등록하는 방법과 구직 사이트,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업체도 소개해줬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이런 요청을 해왔다.  


"내가 이력서 써 본 지 오래되어서 말이야, 그리고 영국의 이력서 양식은 나도 모르거든. 그러니 자기가 내 이력서 좀 번역해줄래?"


자신의 이력서 번역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은 도대체 뭘 번역하겠다는 거지?  



나한테도 일 떼줄래요?


소수에 해당하지만 분명 이런 요구도 있었다.


앞서 나온 '나도 소개해줄래요?' 단계를 건너뛰는 사람이다. 내가 했던 것처럼 구직 사이트에 등록해서 업체의 연락을 기다리거나 공고를 낸 업체에 직접 이력서를 보내고, 또 실력 검증을 거치는 단계가 귀찮아서다. 이 과정이 지루할 정도로 긴 건 사실이다. 


'내 실력은 너도 잘 알지 않냐?'

'우리 사이에 그런 복잡한 단계가 왜 필요해?'

'너 혼자만 해 먹지 말고 나눠서 하자'


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한다. 업체에 연락하고 실력을 검증받는 일은 번거로우니, 내가 평소보다 일을 두 배로 받아서 자기에게 나눠주면 된다, 식이다. 번역을 집에서 하는 간단한 부업 정도로 보는 건가 의심이 되었다. 아무리 단순 노동이라도 성실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지 않은가. 번역할 자료를 잔뜩 쌓아두었다가 인심 쓰듯 주변 사람에게 나눠줄 수도 없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도 대처하는 방법은 있다. 질문 하나만 건네면 된다.


'그동안 번역 업계에서 제가 유지하던 평판에 맞게 번역 품질과 기한을 지켜줄 수 있나요?'


그랬더니 상대의 얼굴이 굳어졌다. 더 이상 어떤 요구도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겠구나 희망을 품은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서로가 책임질 수 없는 요구에는 정색을 하고라도 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번역에도 전문 분야가 있다. 번역가로 등록할 때 이를 상세히 밝히는 과정을 거친다. 법률 상식이 없는 사람이 법전을 번역할 수는 없다. 문과 출신이 아무런 준비 없이 공대생의 전공 서적을 읽을 수 없다. 내용 자체를 이해 못 하는데 번역은 어떻게 하겠나? 패션이나 교육, 인문 분야를 주로 번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법률, 경제, 심리, 의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람, IT나 중공업, 조선 분야를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전문 분야에 대한 구분도 없이 단순히 외국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자료나 번역할 수 없다. 




번역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을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나는 성심껏 정보를 공유한다. 하지만 번역은 아무나, 아무거나 할 수 없음을 상대에게 꼭 강조한다.


Photo by Jeremy Bezan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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