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국에 사니까, 영국식으로 하자

by 정숙진

"숙진이, 아줌마 다 되었네."


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A가 건넨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학 다닐 때 알던 사람을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당연히 나이 들어 보이겠지. TV 속 연예인도 아닌 40대 여자가 20대 모습을 간직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서로 막역한 사이도 아닌데 첫인사로 듣기는 거북한 소리였다. 그렇게 말한 A도 2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채 등장해 놓고, 왜 내 얼굴만 가지고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A는 영국에서 만난 고향 사람이다.


고향 사람이긴 한데 고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우연히 내 주민번호를 보고서 동향 사람이라 직감한 A가 먼저 알은체를 하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인연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한국에 있을 때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고, 고향에서 마주친 일은 더욱 없었으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다 우연히 영국에서 다시 연락이 된 것이다.


나는 인간관계를 적극적으로 넓히는 편이 아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나와 가족을 이용하려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있어서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주었을지도 그래서 그들과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A와의 인연을 굳이 다시 이어갈 이유는 없었지만 그가 고향 사람이라는 끈 때문에 그리고 나보다 연장자이고 먼저 연락해 왔으니 차단할 이유도 없었다.


올해 몇 살이 되었나?

왜 애는 하나밖에 안 낳았나?

무슨 일 하고 사나?

신랑은 무슨 일 하고?

영국에는 왜 왔는데?

영국에 몇 년 살았는데?

집은 어디에 있고?


세세하게 물어왔다.


고향에서 만난 어른이라면 흔히 할 법한 질문이긴 한데, A는 호적상으로만 고향 사람이지 사회에서 만나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고향 어른처럼 나오는 태도가 어색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해서는 세세히 물어보면서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히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박사 과정을 거치며 겪은 일과 공부 잘하는 딸에 관해서만 자랑스레 말할 뿐이었다.



"내가 영배 형님보다는 아래지만 영훈이 보다는 위거든..."


영배, 영훈은 내 삼촌들이다.


20여 년 만에 고향 사람을 다시 만나 소식을 전하려다 보니 서로의 나이부터 정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나이부터 곧장 밝혀야 했지만 상대는 나이를 직접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A는 자기 나이를 알려줄 듯 말 듯 하면서 아리송하게 말했다.


내가 큰삼촌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머릿속 짐작으로 상대 나이를 맞추라는 건지. 말 안 하면 그뿐인데 듣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두 삼촌을 한꺼번에 언급하며 은연중 자신이 내게 삼촌뻘 어른임을 계속 강조하는 걸까? A가 언급한 내 삼촌들은 맏이인 내 아버지보다 한참 뒤에 태어나, 나이로만 따지면 내게 오빠뻘이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국가와 현재 살고 있는 국가, 두 문화권의 영향에서 갈등할 때가 있다. 이 때문에 대화나 행동에서 종종 이질적인 요소를 드러내곤 하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문화가 뒤섞인 대화법이 불쾌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쪽과 저쪽의 문화를 구실로 갖다 대고 있어서다.


내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내 나이와 근황을 먼저 물어놓고 자신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A처럼 말이다. 서양에서는 나이 같은 거 안 물어보잖아,라고 얼버무리기까지 한다.



"이건 한국식 (영국식)이거든요."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문화적 차이로 인해 타인과 의견 충돌할 때가 있다. 심지어 같은 문화권 사람과도 충돌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한국인의 눈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영국인에게는 낯설어 보이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분명 있어서다.


같은 행동이라도 한국인과 영국인이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에,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기 마련이고 간혹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이건 한국식이다' 혹은 '이건 영국식이다'라고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했다.


두 나라 문화의 행동 양식을 가지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 나 또한 내게 더 유리한 방법을 선택하고 만다. 단순한 문화적 차이임에도, 내 낯선 행동을 이해 못 하는 이가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훈계하려 들면 나를 방어할 수단이 필요해서다.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두 문화권을 오가며 애매모호한 대화와 행동을 하는 셈이다.




대화 내내 친척 어른 행세를 하는 이에게서 느낀 불쾌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모임 장소를 정할 때부터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부산과 울산에 떨어져 사는 사람끼리 만나면서 대구를 약속 장소로 정하는 형세였다. 내게는 멀고 불편한 지역이니 차라리 A가 사는 도시로 가족과 함께 가겠노라 내가 제안했다. 집에 초대할 필요도 없이 편한 장소에서 만나자고도 했다.


그럼에도, A는 자신이 애초에 정한 장소도 가볼 만하다며 - 실은, 자기가 갈 일이 있다며 -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만나자마자 왜 애는 하나밖에 안 낳았나, 아줌마 다 되었네 등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발언을 연신 쏟아내면서.


불쾌하기 짝이 없고 지루한 대화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A가 한마디 던졌다.



"우리 영국에 사니까, 영국식으로 하자. 각자 먹은 만큼 돈 계산하자고."



커버 이미지: bing.com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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