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나는 피아노 공부 동기다.
내 나이 마흔일 때 시작한 일이다. 아들이 열 살이었으니 내게 육아와 집안일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시기적으로 도전해 볼 만했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내세울 근거가 필요해서다.
아들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열 살짜리 꼬마도 배우는데 나라고 못하겠어'의 심정이었다. 피아노만 같이 배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패들보딩, 스키, 스케이트까지 그전에는 감히 생각도 못하던, '이 나이에 가능할까?' 싶었던 두려운 도전거리를 얼떨결에 시작하다 보니 나 또한 디딜 언덕이 필요했다.
피아노를 배운다고 해서 집으로 피아노 선생님을 부른 것도 아니고 학원으로 가서 배우는 일도 없었다.
물론, 나의 경우, 배움의 한계를 느껴 최근 잠시나마 학원을 다니기는 했는데, 당시만 해도 책과 비디오만 있으면 되겠지 하는 우직한 방법을 썼다. 무허가로 교습을 시작한 셈이다.
피아노 건반도 '이걸 이렇게 누르면 되겠지?' 하며 두 모자가 서로 의논하고 도와주고 경쟁을 해가며 기초를 쌓는 식이었다. 어느 정도 건반에 익숙해지자 각자 마음에 드는 악보를 골라 자율적으로 연습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무허가 교습소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그런데, 피아노를 배운 지 3개월이 될 무렵 아들이 애국가를 연주하겠다고 나왔다.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까지 부른다고 했다.
보우하사에서 막히나 보다.
우리 집 무허가 교습소에서는 노래를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칠 능력도 안 되지만 당시 연주자의 실력으로 노래까지 부르는 건 무리였음에도 아들은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를 치겠다 고집을 피웠다. 무허가답게 그러라고 했다.
초등학생이 애국가를 부르고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르고 닳도록' 이 정도의 문구도 아들에게는 어렵다. 읽고 쓰기 힘든 말이다.
위 영상을 찍은 지 10여 년이 지나 이제 대학생이 되었건만 아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말이다. 집에서는 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집을 떠나 대학을 다니느라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을 때도 한국어를 사용하게 하는 데도 말이다. 글자로 써보라고 하면 '말흐고 달토록'... 이 정도가 아들에게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해외에서 성장하는 아이라면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아예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가정도 있을 정도니까. 말의 뜻도 모르며, 글자로만 익히려 해도 어려워한다. 그런 아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또 연주까지 하겠다 나오니 신기하지 않겠나. 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가 '하느니임 볼우하서'가 되지만.
영국의 국가(國家)인 <God Save the King>을 외우는 초등학생은 별로 없다. 학교에서 가사를 외우게 하거나 노래로 부르는 일이 없어서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해인 2022년까지만 해도 지금의 <God Save the King> 대신 <God Save the Queen>을 부르는 시절이었다.
이 때문인지 영국의 성인 중에도 가사를 못 외우는 사람이 있다. 축구 감독인 웨인 루니가 선수로 뛰던 시절, 경기 시작 전 국가를 부르는 자리에서 입도 벙긋 못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학교 조회 시간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4절까지 가사를 몽땅 외워 적는 시험을 치며 학창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축구 선수도 아니고 한국의 애국가든 영국의 국가든 가사를 외워서 시험 칠 일도 없던 아들이 어쩌다 애국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초등학생 때 아들의 취침 시간은 밤 8시였다.
마침, 내 휴대폰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켜 두었더니 한국 시각으로 오전 5시 * 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럴 때면 노래를 다 들을 때까지 아들이 안 자고 버티려 했다.
이런 식으로 자러 갈 때마다 한국의 라디오 음악을 듣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애국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를 다 외우지도 못하고 뜻도 모르면서 단순히 몇 소절 따라 부르는 정도지만, 그래도 애국가가 중독성이 강한 음악이었나 보다.
* 영국의 서머타임 기간에는 한국과의 시차가 8시간, 동절기에는 9시간 차이 난다.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올 때마다 집 떠나기 전 생활 습관을 유지해 보라는 나의 제안에, 아들은 지금도 저녁마다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물론, 나도 동참한다.
덕택에, 오늘도 우리 집 무허가 교습소에는 악기 연습이 이어진다.
커버 이미지: 태코맥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