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원통 모형의 치즈를 쫓아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언덕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치즈를 굴린다고 해서 치즈 롤링 (Cheese rolling)이라 불리는 행사지만, 치즈는 화면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들만 뒹굴고 있다.
설마...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언덕 아래를 향해 굴러가는 물체를 따라잡을 정도로 초인적 힘을 발휘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치즈를 잡는 것이 아닌 결승선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고 한다. 가파른 언덕에서 뛰다 보면 두 발로 멀쩡하게 서서 가기도 힘들 테니 말이다.
대회 장소는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글로스터 (Gloucester)라는 도시다. 바로, 이 도시의 이름을 딴 유명 치즈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이 대회의 역사는, 14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글로스터 치즈의 기원과 거의 맞먹는다. 지금처럼 대회 형태가 아닌,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고 지역 주민의 화합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로 시작되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제는 지역 주민뿐 아니라 타 도시, 해외에서까지 참가자, 구경꾼으로 몰려올 정도로 유명한 대회로 성장했다.
경기 방식은 단순하다.
언덕 꼭대기에서 선수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다가, 심판이 들고 있는 치즈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출발하면 된다.
내리막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면 직립의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부분의 선수들이 몸의 균형을 잃고 치즈 덩어리처럼 몸을 구부린 채 굴러가고 만다.
결승선까지 거리는 180미터
언덕의 최대 경사도는 50%
움푹 파인 곳에선 몸이 푹 꺼지기도 하고
불쑥 솟은 곳에선 몸이 부딪히기도 하고
옆사람의 발에 걷어 차이는 등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결승선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여럿 대기하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지는 대회 참가자를 잡아주거나 부상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이송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 럭비 선수 출신이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누군가 굴러오면 잡아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럭비 태클을 걸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상상해 보라.
가파른 언덕에서 뛰고 구르기를 반복하다가 돌부리에 부딪히고 다른 참가자와 몸이 엉키기도 하는 등 온갖 고난 끝에 겨우 결승선에 도달했더니 이제는 럭비 선수와 맞짱을 떠야 한다고?
↑ 5월 26일에 열린, 2025년도 경기 장면이다.
전체 경기 흐름이 어떤지 또 언덕의 경사도가 얼마나 심한지 볼 수는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어 아쉽다. 이는 2019년도 영상에서 확인해 보자.
↑ 경기가 끝나고 과연 온전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심하게 부딪히는데도 다들 진지한 모습이다. 일부는 웃는 여유도 보인다. 관중석에서는 수시로 웃음과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밑에서 기다리는 행사 요원 또한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선수를 맞이한다.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이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
한 차례 경기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성 팀, 여성 팀, 어린이 팀으로 나누고도 각 팀에서 몇 차례씩 경기를 더 치른다. 수백 년간 행해지던 관습대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다운힐 (Downhill) 종목도 있지만, 반대로, 언덕 위로 올라가는 업힐 (Uphill) 종목도 생겨났다.
경기가 진행될 언덕 입구에 표시된 경고 문구다.
행사장 주변은 얄팍한 그물망으로 관중석과 경기장을 구분해 놓았을 뿐이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빠르게 뛰어 내려가는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관중도 안전하다 할 수 없다.
행사장에는 구급차와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지만, 매번 부상자가 속출하다 보니 대회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대회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코로나 19로 인해 행사가 공식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치즈 롤링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정말 궁금했다. 거액의 우승 상금이라도 걸린 걸까?
놀랍게도, 우승 시 주어지는 상품은 이들이 그토록 힘겹게 쫓아가던 치즈 한 덩이가 전부다. 3~4kg 정도의 치즈 한 덩이만 바라보고 그런 위험한 경기에 참여하다니.
그런데, 높은 산보다는 완만한 언덕이 더 흔한 영국에서 살다 보니, 치즈 롤링 대회에 참여하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도 같다.
↑ 치즈 롤링 대회가 아니다.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렇게 노는 아이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어른들 몰래 장난치는 걸까?
아니다.
옆에서 부모가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녀를 부추기기까지 한다.
아이들이 자연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자는 게 영국에서 권장하는 양육 방식이다. 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게임기나 TV에 몰두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 최대한 몸을 많이 움직이고 자연과 어울리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 본다.
이런 자연 친화적인 놀이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언덕에서 구르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언덕을 구르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만 해도 큰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가 제정신이가 싶기도 했다.
바위와 돌투성이인 한국의 산악 지형과 달리 영국에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풀밭으로 뒤덮인 언덕이 많다. 전 세계 어린이의 사랑을 받았던 영국의 TV 캐릭터가 사는 텔레토비 동산을 연상하면 된다. 이런 장소라면 온몸으로 구른다 해도 다칠 염려가 덜하지 않을까?
물론...
주변에 가시덤불과 돌부리 등 튀어나온 물체가 없는지 미리 확인하고
위 사진에 나온 아이들처럼 손을 앞으로 모으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기본적인 안전수칙은 지켜야 한다.
영국에서 발견한 자연 친화적이면서 다소 위험해 보이는 놀이터가 또 있다.
↑ 앞서 나온 치즈 롤링의 본고장 글로스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항구 도시 브리스틀에 있는 언덕이다.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미끄럼 타듯 암벽을 타고 내려오고, 뒤에서는 어른이 지켜보고 있다.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행위이다 보니 길게 뻗은 암벽의 한쪽 부위가 반들거릴 정도로 매끈해져 있다.
브리스틀 암벽 미끄럼틀은 웹사이트에도 당당히 소개되어 있는 관광 코스다. 잉글랜드에서도 절벽으로 유명한 도시인만큼, 이 미끄럼틀이 끝나는 지점에서 몇 발짝만 더 가면 곧바로 절벽이 나타난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서 온몸으로 뒹굴고 가파른 암벽도 미끄럼틀 삼아 타고 내리며 성장했다면 다소 위험해 보이는 치즈 롤링도 놀이로 치부하지 않을까?
치즈 롤링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극심한 고소공포증 때문에 내리막길을 향해 뛰는 건 상상도 못 하겠지만, 언덕 위로 올라가는 종목은 도전해 볼 만하다 싶었다. 매년 5월의 마지막 공휴일에 해당하는 봄 공휴일 (Spring Bank Holiday)에 실시되는 치즈 롤링 대회를 핑계 삼아 글로스터로 여행을 떠나도 좋고 말이다.
그런데, 가족들이 따라 줄 것 같지 않다. 과도한 모험 정신이 필요한 도전과제를 생각해 낼 때마다 가족을 끌어들이려는 내 성향을 이미 파악해 버린 듯하다.
당분간 영상으로만 열심히 지켜봐야겠다.
커버 이미지: cheeseprofessor.co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