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를 앞두고 아들과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지도 글로 적지도 못하던 아들의 말투 그대로다.
불우어린이돕기 행사인 '퍼시 곰의 날 (Pudsey Bear Day)'을 맞이하여 학생은 교복 대신 퍼시 캐릭터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어야 했다. 아들에게 이런 사실을 전달했더니, 선생님이 그런 말 한적 없노라 주장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오늘 퍼시 곰의 날'이라고 했어. 교복 대신, 퍼시 곰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는 날이라고."
"서쎄님이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
"어제, 엄마가 선생님한테 들었거든."
"나는 들은 적 없는데요."
"학교에 모인 엄마 아빠들 앞에서 선생님이 말했다니까."
아들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집에서 늘 한국어로만 대화 나누고, 영어공부는 동화책과 TV 방송으로만 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영국의 교육 기관에 - 정확히는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 -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잘 적응할까 내심 걱정했지만, 정작 이 꼬마 아이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아들이 바지 지퍼를 스스로 내리지 못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내게 지퍼를 내려 달라 부탁하더니, 그럼, 학교에서는 어떻게 한 거지?
나의 뒤늦은 걱정에, 아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바지 앞섶을 움켜쥐고 헬프를 외치던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였다.
지퍼뿐 아니라,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말이 안 통할 때마다 무조건 '헬프'라고 외치면 다 해결된 모양이다. 노련한 교사의 대처 덕택인지 아들의 느긋한 태도 때문인지, 부족한 영어 실력에도 학교에 잘 적응했다. 어떤 집 아이는 '플리즈'로 모든 일이 무사통과되더라는 말도 있다만.
그런 아들이 '서쎄님이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라고 우긴 것이다.
아들의 고집대로 평소처럼 교복을 입고 나가면 될 일 아닌가,라고 하겠지만...
솔직히, 아들보다 엄마인 내가 창피해질까 두려웠다. 영국의 수많은 초등학교가 이날 동시에 행사에 참가하는데 내 아들만 교복을 입고 나타나면? 학교에서는 둘째 치고, 당장 거리에서 내 체면이 말이 되냐고.
우리 집을 기준으로 얼추 동서남북 근거리에 4개의 초등학교가 골고루 위치해 있었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등교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사방에서 매일 비슷한 시각에 보곤 했다. 이날 이들과 마주치면 부모인 내가 이 중요한 행사를 잊은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는가.
언제든 울음을 터뜨릴 듯 불만 가득한 표정의 아들을 겨우 설득해 점박이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게 했다. 그러고 집을 나섰더니... 하하하, 저거 보라고, 길을 건너기도 전에 벌써 알록달록한 색깔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엄마 곁에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아무 말 못 하고 주변만 바라보는 꼬마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들과 나는 논쟁을 자주 벌였다.
이제 겨우 의사표현을 하나 싶을 정도로 어리고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서툴러도, 아들의 말과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었다. 그러다 문제가 있다 싶을 때 이를 지적하고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된 지금도 논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에는 엉뚱한 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한국에서만 익혔던 엄마의 영어 실력을 아들은 늘 못 미더워했다. 영어도 전공하고 영국에서 직장을 다닌 엄마요, 이제는 집에서 번역일을 하는 엄마다. 다른 학부모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눈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늘 보는 원어민보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가 아들에게는 그저 어설프게만 보였나 보다.
아들은, 부모의 영어 발음이 학교나 TV에서 듣던 것과 다르다 싶으면 곧바로 지적했다.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특히 현지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지 않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다.
A가 급하게 뛰어오며 하는 말이다. 자신의 엄마가 다른 학부모와 대화 나누는 광경을 목격해서다.
영어가 어설픈 엄마를 위해 A가 어린 시절부터 통역을 해주더니 이제는 엄마 혼자서 대화에 나서는 일을 막아서는 셈이다.
어른의 대화에 끼어드는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집 또한 이래저래 내 지적 수준과 전문성을 아들로부터 의심받아 왔다.
이런 환경에서, 아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면 둘의 대화는 논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그런 논쟁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너 그때 그렇게 고집 피운 일 기억나니?' 라며 지금껏 아들에게 우려먹고 있는 논쟁이다.
아들이 아홉 살 때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대비해, 아들의 반 친구 전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이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이런 때 학생의 명단을 나눠줬지만, 이번 학교에서는 그런 자료를 줄 수 없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두 모자가 머리를 맞대고 26명의 급우들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기로 했다.
Theo
Wiktoria
John
Amelia
Bertie
Charlotte
Henry
Natasha
Jacob
Sasha
......
잦은 이사 때문에 아들은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겼는데 두 번째 초등학교까지는, 급우들 이름을 다 외웠으니, 엄마는 능력자라고 지금껏 자랑한다. 이날도 26명 전원을 거의 오롯이 나 혼자 힘으로 기억해 내고는 한껏 뿌듯해하고 있는데, 아들이 문제를 지적했다.
"엄마요... 존 이름은 J-O-H-N이 아니라 J-H-O-N인데요."
"뭐...? 존의 철자가 어떻게 J-H-O-N이 되냐?"
"내 친구는 J-H-O-N 맞아요. 걔 이름이 적힌 걸 내가 봤어요."
"엄마가 영국 사람 중 J-O-H-N 하고 J-O-N은 봤어도, 지금껏 J-H-O-N은 본 적 없거든."
"내 친구 이름은 달라요."
오로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JHON인가 보다. 자기가 봤다고 우기는 아들 앞에서 뭐라 받아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틀린 철자 그대로 카드에 적어 보낼 수도 없었다. 아들의 제일 친한 친구 아닌가.
존의 부모에게 물어봐도 되지만 이런 걸 확인시켜 달라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답을 뻔히 알면서도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선생님의 답장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말했다.
아들아, 아직 J-H-O-N이란 영국식 이름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단다.
아들이 대여섯 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새 단어를 배우고 오면 아들은 그날 배운 단어를 그림으로 보여주며 나를 테스트했다. 그 많은 테스트를 매번 무사히 통과했지만, 딱... 두 문제 틀리는 바람에 내 영어 실력이 평가절하된 사건으로, 나로서는 상당히 억울하다.
아들이 보여준 그림 1 (동일한 그림은 아니고 대충 이렇게 생김)
"엄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어... 이거... 잠자리채인가?... 뭐지?... 모르겠다."
"윈드속이에요."
"윈드... 뭐...???"
* Windsock = 바람자루
이날까지만 해도 나는 이 물체의 존재를 몰랐고, 당연히 한국어와 영어, 그 어떤 단어로도 알리가 없었다. 유치원생에게 철자를 물어봐야 했다.
아들이 보여준 그림 2
"엄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이거... 어... 술병인가?"
"바~즈에요."
"바즈???"
아들이 내민 종이에는 실물 사진이 아닌 단순 그림이 담겨 있었다. 술병일 거라는 내 예측이 황당할 수도 있지만 꽃병은 더욱 의외였다.
나는 흥분해서 아들이 보는 앞에서 곧바로 사전을 펼쳐 들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arola G on Pexels
끝